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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위기·약자 목소리 고찰… ‘10권의 통찰’ 우리 사회를 말하다[북리뷰팀이 선정한 ‘올해의 책’] 정치 양극화, 소외되는 약자의 목소리, 그리고 과거의 기억. 2024년 문화일보가 선정한 ‘올해의 책’은 우리 사회를 오롯이 담았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를 상기시키는 책들이 유독 눈에 띄는 한 해였다. 올 한 해 북리뷰 지면을 통해 소개된 책을 중심으로 북리뷰팀 기자들이 10권의 책을 엄선했다.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경고와 진정한 보수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때마침 적절해 보인다. 돌봄 노동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일본의 연구, 사회에 여전히 계급이 존재한다는 영국의 연구 등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시사점을 준다. 또, 우리 역사 속 과학자들을 재조명한 연구서와 여성 문학의 계보를 재정립한 선집, 올해 가장 주목받은 신인 작가의 소설집까지. 다시 읽고, 묻고 답하며 새해를 준비할 시간이다.슬픔 속에도 유머가… 우리 일상 같은 이야기■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김기태 지음│문학동네2022년 등단한 작가의 첫 소설집. 각각 이상문학상 우수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진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됐다. 작가의 첫 책이지만 5만 부 가까이 판매됐으며 신동엽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해 준비된 작가의 새로운 언어를 문단에 각인시켰다.소설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티케팅에 실패했어도 게릴라 콘서트를 기대하며 콘서트장을 서성이는 팬(‘세상 모든 바다’)이거나 유명 연애 프로그램의 참가자(‘롤링 선더 러브’) 등이다. 그들이 겪는 사건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바로 그 점이 강점이다. 작가 특유의 리얼리즘으로 불러낸 인물들은 평범하기에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일어나지 않은 재앙들을 걱정하는 어떤 한 사람(‘팍스 아토미카’)의 마음이 바로 2024년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 독자들은 자화상을 보듯 씁쓸함을 느낀다. 그러나 무엇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번 편 책을 좀처럼 덮지 못하도록 만든다.주변 문학으로 치부된… 여성작가들 집중 조명■ 한국 여성문학 선집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민음사국문학 연구자 김양선(한림대), 김은하(경희대), 이선옥(숙명여대), 영문학 연구자 이명호(경희대), 이희원(서울과학기술대), 시 연구자 이경수(중앙대) 교수가 12년 동안 치열한 고민과 토론을 거쳐 집대성한 한국 여성문학 100년사. 총 7권으로 구성된 선집은 개화기 양반 계층 여성인 이 소사와 김 소사가 신문에 투고한 ‘여학교설시통문(1898)’과 ‘부인회 애국가(1898)’를 여성 근대문학의 태동으로 짚는다.이후 줄곧 주변부 문학으로 치부돼 온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문학사의 한복판으로 불러낸다. 1930년대 통속 소설이라며 비판받던 김말봉의 ‘찔레꼿(꽃)’을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냈다는 관점에서 새롭게 읽고 사회주의 계급소설로 분류되던 박화성의 소설도 젠더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또한 박순녀와 이정호의 1960년대 소설을 전후 시대의 시대 정신으로 복원한다.마침내 1980, 1990년대를 다루는 6권과 7권은 여성 문학의 폭증을 드러낸다. 최승자, 김혜순, 은희경, 한강의 작품, 작품세계에 대한 해설이 함께 묶였다.日 고령사회 사례로… 미리 보는 한국 사회■ 돌봄의 사회학우에노 지즈코 지음│오월의봄노인 인구 1000만 명 시대를 코앞에 둔 한국 사회에서 ‘돌봄’은 사회적 현안이다. 올 한 해 돌봄을 주제로 한 다양한 책이 출간됐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책이다. 일본의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가 900쪽이 넘는 분량으로 쓴 고령자 돌봄에 관한 책은 한국보다 먼저 고령사회를 경험한 일본의 사례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조망할 수 있다. 책은 2000년 4월 일본에서 시행된 개호보험제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본의 노인장기요양보험인 개호보험의 도입은 가족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고령자에 대한 돌봄 책임이 공적 영역으로 이동한 중요한 분기점이다. 저자는 제도 도입 이후 10년간 일본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를 현장 연구를 통해 발견하고 장애인·유아·고령자가 함께 거주하는 ‘공생 돌봄 시설’과 같은 새로운 형태에도 주목한다.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등의 저서를 펴내며 오랜 기간 돌봄 문제를 연구해 온 저자인 만큼 돌봄 노동의 저변에 있는 사회적 의미를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해보게 한다.장애인 무용수도… 무대위에선 모두 평등■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김원영 지음│문학동네장애인 무용수, 작가, 변호사라는 다양한 직업 정체성을 밑바탕에 두고 신체와 장애에 대해 써온 김원영 작가가 6년 만에 출간한 단독 저서. 주목받았던 전작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펴낸 후 신체가 두드러지지 않는 변호사의 삶을 뒤로하고 무대에서 몸으로 말하는 무용수의 길로 나아간 그의 경험은 풍부해졌고 글은 한층 더 유려해졌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몸’에 대해 가장 냉정한 곳 중 하나로 공연 무대를 꼽는다. 신체적 조건이 무엇보다 우선시되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험대인 만큼 오랜 기간 이곳은 건장한 몸을 가진 이들이 활개 치는 장소였다. 무대에 장애인 예술가가 오른 초창기 사례인 ‘프릭쇼’가 전형성에서 벗어난 이들을 전시했다면 이제 뇌성마비와 언어장애를 가진 연극배우들은 비장애인 배우들과 함께 공연에서 온전히 존재한다. 책은 발레리나의 32회전 동작과 김원영의 기는 동작은 차별적이지만 이들이 우위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동시에 평등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일제 ~ 해방 이후까지… 숨은 과학 영웅 소개■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김근배·이은경·선유정 지음│세로북스예년과 달리 대중 과학서의 인기가 줄어든 올해, 그간 다뤄지지 않던 한국의 근현대 과학사를 조명한 책이 나왔다. 김근배 전북대 교수를 비롯해 연구진이 15년간 한국의 근현대 과학자들에 관해 연구한 끝에 그 첫 결과물이 나왔다.책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공백의 역사로 남았던, 그러나 우리나라 과학의 토대를 만든 과학자 가운데 30명을 소개한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해 네브래스카대 화학과에 진학한 한국인 첫 화학자인 리용규부터 일제강점기 시절 세계 최초로 비타민E 결정체 추출에 성공해 노벨상 유력 후보로 거론된 김량하, 최근 타계한 위상수학의 권위자 권경환까지 낯설지만 기록돼야 할 인물들의 성취와 생애를 사진과 함께 담았다. 격동의 시기였던 해방 전후의 시기에 이들의 이름은 좌우 이념 대립, 정치 활동과 같은 이유로 삭제됐다. 김량하는 해방 후 여러 정치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숙청을 당했고 ‘나비박사’로 불린 석주명은 평안도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공산당으로 오인돼 길에서 총을 맞아 사망하기도 했다.英 좌파 자유주의자… ‘보수주의 역사’ 추적■ 보수주의에드먼드 포셋 지음│항아리영국의 정치 저널리스트가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네 나라에 초점을 맞춰 보수주의의 역사를 추적했다. 책은 자유주의를 떠받치는 힘으로 보수주의의 역할을 강조한다. “보수주의의 친구와 적 모두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호평받았는데, 이는 저자가 ‘강경우파’와 보수주의를 구분하고, 온건 보수주의는 생존해야 한다며 그 당위성을 설파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받아들이며 지난 두 세기 동안 급진주의나 사회주의보다 우위를 점했다. 프랑스 혁명을 비판하며 정체성을 확립했으나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손잡은 후엔 선거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 책이 매력적인 보수주의자로 영국의 벤저민 디즈레일리 전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전 대통령을 꼽은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중산층의 정서를 잘 파악했던 디즈레일리 전 총리를 “완벽한 귀”라고, 분열된 목소리까지 꼼꼼하게 챙겼던 레이건 전 대통령을 “섬세한 귀”로 평가했다. 즉 보수주의 정치, 아니 모든 정치의 성공은 늘 경청의 태도와 직결됐던 것이다. 괴물의 예술을 사랑한… 팬들의 무거운 딜레마■ 괴물들클레어 데더러 지음│을유문화사‘괴물 같은 남자들의 예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저자는 전 세계를 강타한 미투(#MeToo) 운동이 단순히 예술계를 장악했던 괴물들의 파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이 만들어 낸 예술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괴물의 의미를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예술을 예술만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재정의한다.저자는 미투 운동이 꺼내놓은 무거운 질문에 이론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혹시 나도 괴물일까?”라는 성찰에서 시작해 무수한 성희롱과 성폭행 위기를 넘어 생존한 삶을 고백한다. 한 명의 예술 감상자로서 내놓는 이야기들은 저자와 독자 간의 간격을 좁힌다.그럼에도 저자는 인생의 한 부분에 깊이 박혀 있는 괴물들의 예술을 말끔히 제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책을 덮은 뒤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는 지금껏 괴물들의 민낯을 알면서도 그들의 작품으로 수익을 내기 위해 눈감았던 산업을 바꿔내자고 말한다. 괴물들을 앓지 않는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대물림되는 富·성공… ‘계급의 종말’은 없다■ 계급천장샘 프리드먼·대니얼 로리슨 지음│사계절영국과 미국의 두 교수가 함께 쓴 책은 신분 이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부모의 재산, 지위, 학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영국사회의 다양한 지표를 조사·연구한 후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다수가 특권층 출신이며, 그 성공은 ‘능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책은 영국 노동력조사 자료에 나타난 개인 10만8000명, 엘리트 직종 종사자 1만8000명의 부모 직업을 전문직 및 경영직(특권층), 중간직(중간계급), 노동계급으로 나눈 후 자녀 직업을 살폈다. 하층 출신은 의료 등 엘리트 직종에 종사할 확률이 특권층보다 약 6.5배나 낮았다. 반면, 특권층 자녀들은 상위 직급에 도달할 확률이 2배 이상 높았다. 책은 이를 ‘계급천장’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에서 따온 말로, 신분 이동을 방해하는 사회문화적 요인을 뜻한다. 저자들은 엘리트 직업 내 출신 계급을 정기적으로 파악해 천장 효과를 유발하는 요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부모 찬스’가 작동하기 쉬운 무급 인턴십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극단주의자 무기가 된… 민주주의 허점과 한계■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어크로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두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의 신작은 많은 독자가 출간을 기다려왔다. 전작을 통해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을 중심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한계를 짚어냈던 이들은 그로부터 6년 후, 이번엔 2021년 트럼프의 낙선 이후 파괴된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를 날렸다.책은 2021년 1월 6일 대선 패배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가 감행한 국회의사당 습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저자들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권력이 평화롭게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이양된 최초 사례가 미국이라는 아이러니를 짚으며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 갈등의 배경에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짚어낸다. 책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 잡음 없이 패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앞으로 다시 승리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고 여겨질 때, 그리고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트럼프의 재당선으로 또 한 번의 정권 교체를 앞둔 지금 민주주의는 시험대에 올랐고 책을 읽어볼 또 하나의 이유가 추가됐다.윤치호·뮈텔·정교… 5명이 쓴 대한제국사■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김태웅 지음│휴머니스트대한제국 시기는 종종 책을 통해 다시 소환된다. 외세의 침략과 몰락을 겪은 시대인 동시에 민중의 저항과 개혁의 몸부림이 있었던 만큼 다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한 흥미로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올해도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비롯해 다양한 책이 출간됐지만, 그중에서도 이 책은 당대에 실존했던 5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수립부터 국권 상실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복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저자인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선정한 다섯 인물은 각기 다른 특징이 있다. 윤치호는 개화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금의 정치인에 해당하고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주교인 귀스타브 뮈텔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황현은 지식인이며 정교는 언론인, 마지막으로 지규식은 평범한 백성을 대표한다. 서로 다른 인물들은 대한제국의 혼란한 역사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데 이들이 모두 기록을 남긴 덕분에 우리는 망국의 역사를 이야기가 아닌 하나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한 나라의 위기가 그 백성의 위기가 될 수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신재우·장상민·박동미 기자
- 신재우 기자 외 2명
- 2024-12-20 10:29
호라이즌 등[이 책]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전미 도서상을 수상한 저자가 생전 마지막으로 집필해 남긴 논픽션. 북극에서 태평양, 갈라파고스, 아프리카, 호주, 남극까지. 땅끝과 바다 끝, 마침내 빙하 끝까지 두 발로 직접 밟은 뒤 발견한 경이로운 인생의 의미를 담았다. 북하우스. 928쪽, 3만5000원. 시간 불평등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이라는 명제에 반기를 든다. 모든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해결책으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선구적 정치경제학자인 저자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노동과 시간의 역사를 새롭게 직조한다. 노동 해방을 위해 시간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자고 주장한다. 창비. 540쪽, 2만8000원. 돌봄의 역설김준혁 지음. 의료인문학과 의료윤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누구나 돌봄을 원하지만 아무도 돌보려 하지 않는 역설적인 상황을 ‘돌봄 위기 사회’라고 진단한다. 취약한 저임금 노동만으로 오늘날 요구되는 진정한 돌봄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며 공동체, 지역사회, 정부가 힘을 모을 것을 강조한다. 은행나무. 404쪽, 2만2000원.오늘도 무사히임준 지음. 출근해 일하다 영원히 퇴근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연간 2000명을 넘는 고소득 국가 한국. 보건의료의 공공성과 보편적 건강권을 연구해 온 저자는 수많은 산재 사망이 재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노동자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음에도 산업안전보건 측면의 만성질환 관리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후마니타스. 288쪽, 1만8000원.너의 오른발은 어디로 가니강석희·김다노 등 지음. 청소년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들이 모여 10대 주인공이 마주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돌봄’에 대해 쓴 일곱 편의 단편을 묶었다. 동생을 돌본 경험부터 조부모 혹은 부모를 돌본 경험, 자기감정을 돌아보는 일까지 언제나 청소년의 곁에 달라붙어 있는 돌봄을 통해 인간의 필연적 상호의존을 떠올리게 한다. 돌베개. 236쪽, 1만4000원.러시아 내전앤터니 비버 지음, 이혜진 옮김. 현대전쟁사의 거장인 저자는 최대 12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내전을 전 세계적 관점으로 새롭게 직조한다. 단순히 한 제국의 멸망 후 발발한 내전이 아닌,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뒤덮은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인간군상의 눈을 통해 불러낸다. 눌와. 688쪽, 3만3000원.두루미 아내CJ 하우저 지음, 서제인 옮김. 파혼 후 열흘 뒤 떠난 외딴 바닷가에서 마주한 사람들과의 일상을 통해 저자는 자신의 삶과 사랑을 돌아본다. 그가 가슴이 저리도록 집요하게 한 질문은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됐는가’에 대한 것이다. 연인과 가족, 친구 등 온전히 내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모든 관계에 대해 말한다. 열린책들. 488쪽, 1만8800원.처음 공부하는 석유·가스 산업 오성익 지음. 우리나라가 산유국이 된다면 어떨까. 저자는 세계 석유개발 산업이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하며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석유 가스가 발견돼 산유국이 된다면, 허약한 국가재정에 엄청나게 큰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함께 내비친다. 단순한 산업 소개를 넘어 국제 관계, 법률, 환경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시각을 제공해 석유 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권에 담았다. 매일경제신문사. 300쪽, 2만 원.미로 속 아이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소재와 배경을 넘나들며 서스펜스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가의 데뷔 20주년 기념 소설.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 대중 작가로 자리매김한 작가는 이탈리아를 배경삼아 마지막 한 줄까지 풀리지 않는 살인 사건 미스테리를 펼친다. 밝은세상. 360쪽, 1만8500원.문화의 수수께끼를 풀다찰스 킹 지음. 문희경 옮김.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인종, 민족, 성별 등은 개능의 지능과 계급,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천부적 운명이었다. 책은 불변의 진리일 것만 같은 명제를 편견의 영역으로 찌그러뜨린 것이 용감한 여행들로부터 비롯했다고 말한다. 교양인. 560쪽, 2만8000원.테이스트스탠리 투치 지음. 이리나 옮김. 골든 글로브상 2회, 에미상 6회 수상에 빛나는 할리우드 배우 ‘스탠리 투치’의 첫 에세이. 그는 이탈리아 음식에서 고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조부모의 사랑을 느낀다고 말한다. 음식에 담긴 내밀한 삶의 기억이 오롯하다. 이콘. 344쪽, 1만7800원.
- 문화일보
- 2024-12-20 09:41
돌아온 ‘전설의 생활툰’… 우리 삶에 웃음 스미길[덕후의 서재] 해외에 코믹스트립과 카툰이 있고 일본에 망가가 있다면, 한국엔 만화와 웹툰이 있다. 같은 콘텐츠를 지칭하는 번역어의 차이가 아니다. 이 콘텐츠들은 서로 뚜렷이 다른 문화사와 양식사적 발전을 보인다. 특히 세계적 산업이 된 웹툰은 그야말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다.이런 한국 웹툰의 초창기를 이끈 것은 일상툰, 에세이툰으로도 불리는 생활툰이었다. 다소 느린 인터넷 환경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에피소드 형식으로 연재되다 보니 중간부터 봐도 이해하기 쉬워, 포털의 비즈니스 모델과도 찰떡궁합이었다. ‘웹툰’이라는 산업이 정착되는 데 기여한 걸출한 생활툰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의 소리’의 의미는 각별하다.‘마음의 소리’는 작가 조석이 2006년에 시작해 2020년까지 무려 14년간이나 연재했다. 네이버웹툰의 걸음마 시절부터 플랫폼의 성장을 함께 이끈 것이다. 장기 연재가 어려운 생활툰 장르에서 14년간 굳건히 우수한 지표를 유지하며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난 차가운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일명 ‘차도남’ 밈(meme)은 웹툰 좀 본다는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생활툰 내에서도 새로운 하위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다. 보통의 생활툰은 작가의 일상을 거의 그대로 기록하는 형태였고, 그렇기에 소재 고갈, 등장인물에 대한 논란, 프라이버시 문제 등으로 오래 연재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생활툰 작가는 언제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각자의 방법으로 작가의 삶과 작품의 재미를 지킨다. 작가 조석은 어느 순간 현실과 판타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기 시작했다. 주변 인물을 바탕으로 하되 과장과 재해석을 통해 개성 있는 캐릭터로 재탄생시켰고, 실화를 트리거로 삼되 스토리는 판타지적으로 창작했다. 처음엔 거짓말이라며 어색해하던 독자들도 이제 이런 형식을 ‘생활툰의 한 장르’로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생활툰을 상상력과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창의적인 표현의 장으로 만들어 난점을 극복한 것이다.개그 표현의 진화도 주목할 만하다. 말장난, 패러디, 반전, 상황극 등 다양한 개그 기법을 활용하면서도, 짧은 개그를 연달아 쌓아 올리는 특유의 쇼트폼식 개그를 확립했다. 읽다 보면 두어 컷마다 피식피식 웃다가 한 번은 크게 터지고야 만다. 이 전설의 생활툰이 2024년, ‘마음의 소리 2’로 돌아왔다. 군대와 편의점 아르바이트 경험을 다루던 젊은 청년 조석은 어느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돼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하고 있다. 시국이 수상하더라도 사회를 지키는 것은 각 개인의 충실한 생활이다. 우리의 삶에도 웃음이 스밀 일이 생기길 기대한다. 전혜정 청강대 교수
- 문화일보
- 2024-12-20 09:41
“혼란의 시대,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 그래서 철학이 필요할때” 우리 사회에 철학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인문학이 쇠퇴하고 그 증거로 인문대 규모는 나날이 축소되고 있다. “철학은 어렵다”는 단순한 말로 배제되기 일쑤다. 그리고 젊은 날, 철학과가 이제 막 생기던 시기에 철학에 관심을 두게 돼 1987년부터 철학과 교수로 재직해온 김혜숙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누구보다 지금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최근 아시아 최초로 국제철학연맹 회장으로 선출된 그에겐 지금이 어느 때보다 철학이 필요한 시기다.“개인의 판단과 선택이 매우 중요해지는 시대에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할 것 같아요.” 계엄과 탄핵 논의가 이어지며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 만난 김 교수는 이 시기를 돌파할 수 있는 철학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김 교수는 ‘철학’을 ‘운동’에 비유했다. 그는 “우리가 운동해서 근육을 키우듯이 생각에도 힘이 붙어야 한다”며 “그런데 또 너무 갑자기 무리해서 운동하면 근육이 다치듯이 생각도 아무렇게나 하면 다칠 수 있다. 지금 양극화되는 사회가 그런 상태로 가게 될까 걱정이 된다”고 진단했다.철학 하기 어려운 사회, 그 안에서 철학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던 김 교수가 내놓은 첫 해답은 최근 출간한 철학서 ‘인식의 대전환’이다.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칸트 철학에 대한 분석철학적 해석과 여성주의적 해석을 시도해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던 그는 이제 시선을 대중에게 돌렸다. 김 교수의 첫 대중 철학서로 이마누엘 칸트의 대표작인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그만의 명쾌한 해설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왜 칸트인가? 그는 “형이상학이 과학으로 대체되는 그 과도기에 칸트가 있었다”며 “흔들리던 철학의 위치를 다시 ‘비판 작업’을 통해 이론적으로 공고히 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칸트는 18세기, 지금보다 한 차례 앞서 철학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에 비판이라는 새로운 사고를 통해 그 의미를 찾아낸 것이다. 대중철학서지만 최근 국내에 출간되는 특정 나이대에 맞는 철학자를 소개하는 일명 ‘철학 자기계발서’와는 구분된다. 김 교수는 “그런 자기계발서 같은 것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게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는 소신을 드러냈다. “우리는 자꾸 바깥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해요. 그런데 철학은 결국 내적 사유 실험의 장이거든요. 선대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길은 하나의 참고 사항일 뿐이에요. 칸트가 논리를 만든 과정을 참고해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대중 철학서 출간으로 첫발을 내디딘 그는 국제철학연맹 회장으로 해야 할 역할에도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 세계 130여 회원국과 150여 개 회원 학회를 보유한 세계 최고의 철학 분야 국제기구의 회장으로서 그는 “우리나라가 특히 서양 철학은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인 상황에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그것도 여성 철학자가 됐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한다”며 다시 한 번 ‘철학을 말할 시간’임을 알렸다. “요즘 시대에 점점 참과 거짓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어요. 인공지능(AI)이 등장하면서 무엇이 인간다움인지에 대한 고민도 늘어났고요. 이럴 때 필요한 건 다름 아니라 논리의 힘을 가진 생각입니다.”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 신재우 기자
- 2024-12-17 09:28
한교총, 탄핵 정국 첫 입장표명 “법과 절차에 따라 조속한 수습을” "국난을 수습하는 권한을 가진 이들은 법과 절차에 따라 현재의 불안 상황을 속히 수습하기 바란다."12·3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과 관련해 침묵해 온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이 처음으로 이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한교총은 개신교 주요 36교단과 6만5000여 교회가 가입돼 있는 국내 최대 개신교 연합 단체다. 한교총은 16일 발표한 ‘한국교회총연합 2024년 성탄절 메시지’에서 "어느 때보다 더욱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사모하는 한해였다"고 밝히고, "국내 정치에서 단순하게 현재 드러난 상황은 이미 오래전부터 배태된 결과"라고 진단했다. 이어, "정치 지도자들이 이념을 자기 정치에 이용하고, 다른 정당을 적대시하고 악마화하며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구현하지 못한 결과가 지금의 국난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 자유 대한민국의 일상이 하루빨리 회복되도록 속도와 절제의 지도력을 보여주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이날 입장문은 최근 한교총 새 대표회장에 선출된 김종혁 목사와 공동대표회장인 김영걸·이 욥·박병선 목사 공동명의로 배포됐다. 이들은 빌립보서 2장 7절을 인용해 한국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전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신’ 예수님처럼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좌고우면하여 흔들리지 말고 말과 행동의 절제를 통해 덕을 세우는 데 힘써 달라"고 호소했다. 박동미 기자
- 박동미 기자
- 2024-12-16 11:12
종교계 “이제는 헌재의 시간, 신속한 판단으로 국민 생활 안정되길” 종교계는 12·3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킨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지난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것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신속히 판단을 내리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15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의장인 이용훈 주교 명의로 배포한 입장문에서 "직무수행 과정에 법과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누구라도 직무에서 물러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정의"라며 "헌법재판소가 신속히 판단함으로써 정국이 제자리를 잡고 국민 생활이 하루빨리 안정되기를 한국 천주교회는 간절히 바란다"고 발표했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김종생 총무 명의로 낸 입장문에서 "국가적 위기 속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용감한 시민들과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한 국회의 결단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이어 "국회의 시간에서 헌법재판소의 시간이 된 지금,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일상의 평화를 외치는 국민들의 결연한 의지에 따라 신속하게 탄핵의 과정을 밟아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신재우 기자
- 신재우 기자
- 2024-12-15 14:03
3년 연속 1위 ‘외모지상주의’ 제친 무협웹툰 ‘화산귀환’, 가장 즐겨보는 웹툰 1위 올 한해 웹툰 이용자들이 가장 즐겨보는 작품으로 무협 웹툰 ‘화산귀환’이 꼽혔다.15일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4 만화·웹툰 이용자 조사’에 따르면 웹툰 이용자 344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1위 자리에 ‘화산귀환’이 올랐다.지난 2021년부터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던 웹툰 ‘외모지상주의’는 2위를 기록했다. 이어 ‘신혼일기’, ‘나 혼자만 레벨업’, ‘김부장’ 등이 뒤를 이었다.‘화산귀환’은 화산파 고수 청명이 사망하고 100년 뒤 다시 환생해 몰락한 자신의 문파를 재건하는 내용을 담은 무협 웹툰이다. 원작 웹소설은 네이버시리즈에서 누적 다운로드 수 7억 회를 기록하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이번 조사에 따르면 웹툰 이용자가 즐겨보는 웹툰 장르는 ‘액션’인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38.8%로 가장 높았고 이어 ‘판타지(32.9%)’, ‘로맨스 판타지’(30.9%)’, ‘코믹·개그(28.1%)’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신재우 기자
- 신재우 기자
- 2024-12-15 14:03
‘중꺾마’ 정신으로 시작하는 노후대책, ‘노후소득 월 천만 원 만들기’ 노후대책은 언제 시작해도 빠르지 않다. 100세 시대를 맞아 퇴직 후 노후소득에 관심이 많아진 가운데 안정적인 노후생활을 꿈꾸는 평범한 직장인들을 위한 책 ‘노후소득 월 천만 원 만들기’(좋은땅)가 출간됐다.지방대 문과 출신으로 암울한 취업 전선에서 ‘중꺾마’ 정신으로 국회와 민간기업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현실적인 사례를 통해 노후 준비를 위한 실질적인 행동지침을 제공한다. 목표는 최소 월 500만 원에서 최대 1000만 원 정도의 안정적인 노후 소득이다. 직장 생활을 통한 연금 포트폴리오를 시작으로 50대 초중반부터 수익형 부동산 탐색, 대학가 원룸 임대 노하우, 에어비앤비 사업전략 등을 통해 노후소득 월 500만 원을 추가로 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특히, 대학 인근의 원룸 건물 투자 사례나, 소형 부동산에서 외국인관광 도시민박업과 에어비앤비 사업을 준비하고 성공했던 경험은 일반 직장인에게도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다. 책은 재정적 조언을 넘어 노후를 긍정적으로 준비하는 마음가짐과 방법론도 제시하고 있다. "정성을 다하면 바뀐다"는 저자의 생활 철학은 학생들이 선호하는 원룸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부단한 정성과 노력, 고객 만족도를 극도로 높이기 위한 세심한 관리 방법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노후 준비와 관련해 좀 더 현실적인 고민과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신재우 기자
- 신재우 기자
- 2024-12-13 12:02
종말론의 홍수… 이면엔 ‘가부장 세계’ 회귀 욕망[북리뷰] 우울한 시절이다. 세상엔 말세의 징후가 선연하다. 기후 재앙으로 날씨는 갈수록 변덕스럽고 이상해진다.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다수의 살림은 나날이 팍팍해진다. 공동 번영의 꿈이 소실되고, 증오와 적대를 선동하고 분열과 혼란을 부추기는 자들이 여기저기 날뛴다. 곳곳에서 파시스트들이 책동을 벌여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앞날에 암울한 어둠만 엿보이는 종말의 시대다. 주변엔 역사상 어느 때보다 종말에 감염된 사람들, 위기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넘쳐난다.‘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에서 아일랜드 에세이 작가 마크 오코널은 이 시대의 종말을 “기존 세계가 작동하는 체계가 서서히 망가지다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으로 정의한다. 사실, 자기 시대를 종말의 징후로 상상하는 사고방식은 인류 문명 자체만큼 오래되었다. 북구 신화의 라그나뢰크, 성서의 계시록에서 보듯, 종말의 시나리오를 떠올리고 최악에 대비하는 건 “급속한 변화와 불확실성의 시대에 으레 나오는 반응”이다.불안의 시대이기에, 오늘날 종말론은 세상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무척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터넷은 종말론이 생겨나고 퍼져나가는 온상이다. 시베리아에 내리는 검은 눈, 항생제 내성을 갖춘 슈퍼 박테리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빙하, 물에 잠겨가는 해안가 도시 등 숱한 사람들이 온갖 이유로 종말의 전조를 예감하고 다양한 징후를 수시로 경고한다. 들여다보고 있자면, 세상은 이미 지속가능성을 잃은 듯하다. 종말의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유다. 저자도 그중 한 사람이다. 저자는 묻는다. “우리 앞에 놓인 날들을 생각할 때, 아이를 낳은 일은 지독한 윤리적 실수가 아닐까.”우리 시대에 만연한 공포, 신경증, 기이한 열병, 그러니까 종말의 강박에서 놓여나기 위해서 저자는 전 세계를 떠돌면서 “불안한 에너지가 유달리 충만해 보이는 장소들”을 찾아간다. 종말의 예언을 믿고 그날을 대비해서 벙커를 파고 식품을 챙기는 이들의 생각이 궁금해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뉴스나 소셜미디어 속의 추상적인 종말론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작동 중인 종말론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오코널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에 있는 ‘생존 대피소 공동체’다. 오래전 군수품 보관소로 사용되던 장소로, 자신과 가족을 지키겠다는 이들이 벙커를 건설하고 식료품을 모아들이면서 종말에 대비하는 중이다. 이어서 그의 발걸음은 피터 틸 같은 부자들이 최악을 대비해 피신처를 만들어 둔 뉴질랜드로, 다시 일론 머스크 같은 이들이 모여 화성 이주와 정착을 논의하는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기후 재앙을 걱정하는 이들에서 미국의 영광을 부르짖는 우파 음모론자들까지 무척 다양하다. 이들은 통조림을 사들이고 생존 장비를 준비하며, 깨끗한 물과 식량을 얻을 방법을 고민한다. 종말을 뜻하는 영어 단어 아포칼립스(apocalypse)는 본래 ‘드러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종말을 말한다는 것은 곧 자기 현재를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냉소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저자는 종말에 대비하는 이들의 말과 행동을 해부해 그 안에 깔린 사고를 밝혀낸다.저자에 따르면, 현실 종말론자들은 ‘미래를 향한 향수’라는 역설적 감정에 빠져 있다. 은신처 마련에 힘쓰는 프레퍼가 실제 바라는 것은 종말을 빌미로 낡은 가부장제 남성성을 돌려받는 일이다. 화성을 개척하려는 이들은 서부 개척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시대 제국주의 미국의 힘을 되찾으려 애쓴다. 이는 종말론이 식민주의, 인종차별, 성차별, 물신숭배 등 미국 백인 남성의 환상에 포획당해 있음을 보여준다. 종말 서사는 과거의 잃어버린 영광, 약자와 소수자의 피를 빨던 그 옛 추억을 동력 삼아 작동한다.틸이나 머스크뿐 아니라 링크드인 창업자 리드 호프먼, 오픈AI 최고경영자 샘 올트먼 등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의 탈출 욕망은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바탕 생각을 보여준다. 이들은 은거 별장을 마련하고 도피 계획을 준비하는 등 예언자인 듯 행동한다. 그러나 신화 속 영웅들과 달리, 이들은 힘을 합쳐 종말을 막아내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들의 꿈은 홀로 방주에 올라타기, “다른 사람을 향한 의무와 얽힘을 해체하는 일”뿐이다. 나라를 버리고 지구를 떠나고 싶다는 욕망은 자기 종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즉 인간이란 존재를 버리고 싶다는 욕망과 이어진다. 저자의 생각에, 이는 결국 “삶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마지막으로, 저자는 종말 이후 풍경이 현실화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을 여행한다. 파괴된 문명의 흔적, 그 공포에 찬 재앙을 체감하면서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여행에서 의외로 그는 구원의 풍경을 마주한다. 인적이 끊긴 곳에서 자연이 스스로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광경엔 핏빛으로 물든 물결이 전혀 없었다. 조용한 회복이 있을 뿐이었다.” 종말은 없다. 망가진 건 고쳐지고, 무너진 건 일어서며, 죽은 건 되살아난다. 이것이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간다. 종말을 부추기는 힘에 맞서 희망을 품고 새로운 행동을 조직할 때다. 336쪽, 2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 문화일보
- 2024-12-13 10:16
귀족시대 [이 책] 임승휘 지음. 웹툰과 웹소설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귀족’. 어딘가 익숙하면서 때로는 낯선 그 귀족의 실제 삶에 관해 다뤘다. 서양사를 전공한 저자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2000년 넘는 역사 속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거쳐 에티켓까지 그 세계를 설명한다. 타인의사유. 296쪽, 1만9800원.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채사장 지음. 지난 10년간 베스트셀러 대중 교양서로 자리매김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완결편이 5년 만에 출간됐다. ∞(무한)이라는 제목처럼 깊은 지식으로 잠영해 습득을 넘어 실천까지 무한대로 나아간다. 웨일북. 352쪽, 1만9000원.파리의 수집가들 피에르 르탕 지음, 이재형 옮김. 17세의 나이에 ‘뉴요커’의 표지 그림을 그리며 화려하게 데뷔, 샤넬 등 유명 패션 브랜드와 협업한 20세기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 피에르 르탕. 열렬한 수집광이기도 했던 그의 수집기를 직접 그린 70점의 일러스트와 함께 만난다. 오프더레코드. 144쪽, 2만 원.세계 감염 예고마이클 루이스 지음, 공민희 옮김. ‘머니볼’ ‘빅쇼트’ 등 실화를 바탕으로 한 르포르타주로 큰 인기를 얻은 저자의 이번 주제는 팬데믹이다. 팬데믹 초기 미국의 대응 과정을 조명하며,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 관료제의 한계와 제도적 비효율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다섯수레. 384쪽, 2만4000원.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김홍중 지음. 사회학자인 저자는 지난 20세기 한국사회를 이끌었던 근본이념이 ‘생존주의’라고 주장한다. 박완서부터 김기영, 박정희, 정주영 등 정치·문화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에서 생존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살펴본다. 이음. 368쪽, 2만3000원.나방은 빛을 쫓지 않는다팀 블랙번 지음, 한시아 옮김. 지구의 40억 년의 역사는 나방이라는 작은 존재에 담겨있다. 생태학자인 저자는 나방의 아름다움에 매혹돼 그 안에 깃든 거대한 자연의 퍼즐을 맞추어나갔다. 나방의 생존과 번식, 자원과 경쟁, 피식과 포식, 군집과 이주의 규칙 속에서 지구의 자연법칙을 발견해낸다. 김영사. 480쪽, 2만2000원.여성사, 한 걸음 더 한국여성사학회 지음. 한국여성사학회에서 2년에 걸쳐 그간 마이너리그로 여겨졌던 여성사를 정리했다. 우리 여성사 연구가 어디쯤 와 있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보여주는 책으로 여성사 연구의 현주소와 함께 AI 시대를 맞아 나아가야 할 연구 방향을 제시한다. 푸른역사. 464쪽, 2만8900원.비커밍 어스페리스 제이버 지음, 김승진 옮김. 지구의 DNA가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 인간이 지구를 변화시킨 만큼 지구 또한 인간종을 변화시켰다는 이야기를 과학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전한다. 생명과 지구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를 조성하며 함께 진화했으며, 지구는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생명체이자 유기체라 말한다. 생각의힘. 416쪽, 2만2000원.불멸의 호르몬안철우 지음. 체온, 식욕, 성욕, 수면은 물론 성장과 면역, 임신까지 인체가 스스로 해야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는 호르몬이 있다. 책은 연령대별 활성 호르몬과 함께 건강을 위한 관리 방법을 소개한다. 시공사. 512쪽, 3만3000원.좋아하는 마음 없이김지연, 구병모, 권여선 등 지음. 2025년 현대문학상의 수상작에 김지연의 ‘좋아하는 마음 없이’가 선정됐다. 수상자의 자선작과 함께 후보작에 올랐던 구병모의 ‘엄마의 완성’, 권여선의 ‘헛꽃’ 등이 수록됐다. 현대문학. 288쪽, 1만5000원.모든 아름다움은 이미 때 묻은 것레슬리 제이미슨 지음, 송섬별 옮김. 압도적인 기쁨일 것 같은 모성이라는 감정은 사실 양가적이다. 여성주의적 글쓰기로 잘 알려진 저자는 출산과 양육의 과정을 통해 복잡한 감정들과 다층적인 경험으로 모성을 바라본다. 반비. 316쪽, 1만8000원.
- 신재우 기자
- 2024-12-13 10:05
늙지 않는 바닷가재 등 해양생물의 경이[북리뷰] 바닷가재 요리에는 일종의 로망이 있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맛 때문에 누구나 선호한다는 것. 고품격 식자재로 인식돼 특별한 기념일이 되면 항상 첫 번째 선택지로 고려된다. 그런데 혹시 아시는지. 이 바닷가재의 나이가 지금까지 측정된 것으로는 최고 140년이나 되며, 절대로 늙지 않는 세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인간 노화의 원인이 염색체 끝에 있는 텔로미어의 변화라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세포 분열 과정에서 이를 보호하는 텔로미어가 자꾸 마모되면서 사람은 결국 늙어가게 된다. 반면 바닷가재는 텔로머레이스라는 효소로 텔로미어를 복구한다. 탈피로 자신의 껍데기에 갇히지 않는 한 영원히 젊음을 유지한다. 푸른빛을 띠어 청어처럼 보이는 날치는 유별난 재주가 있다. 천적들에 쫓기다가 위기일발의 순간 수면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날개 같은 비늘이 펼쳐져 500m 이상 비행한다. 비결은 날개 위아래 공기의 속도와 압력 차로 뜨는 힘, 양력(揚力)에 있다. 바로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책은 생물물리학자의 눈으로 본 바다 생물의 경이로운 세계를 담고 있다. 바다 생물의 매력에 빠진 저자는 수중 환경의 물리적 특성과 그에 적응한 바다 생물이 지닌 생존 기술의 원리를 매우 쉽고 흥미롭게 전한다. 발랑틴 플레시가 그린 해양 생물의 그림도 아주 정교하고 생생해 놀라게 된다. 352쪽, 2만2000원.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 김인구 기자
- 2024-12-13 09:59
투덜이 아저씨에게 선물 건네는 ‘어린이 산타’[어린이 책] 거리에 캐럴이 울려 퍼져야 할 시기다.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들은 성탄곡은 아마 ‘울면 안 돼’가 아닐까 싶다.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 짜증 내는 아이, 장난하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준다는 가사다. 이런 아이는 착하지 않다는 거다. 산타를 믿는 어린이는 12월 25일, 단 하루를 위해 눈물도, 화도, 재미도 참아낼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의문이 생긴다. ‘어린이가 어린이다운 게 나쁜가?’라는.‘모두의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썸머’ 역시 보통의 어린이처럼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이유가 특별하다. 자신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접 산타가 돼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다. 썸머가 정한 대상은 칙칙한 도시 위를 거니는 어른이다. 그중에서도 투정을 받아 줄 사람이 없고, 친구가 없고, 산타클로스도 믿지 않아야 한다.힘든 티 내지 않고 주어진 일만 하는 ‘착한’ 어른을 만나는 게 더 쉬울 텐데. 썸머는 굳이 투덜대는 게 일상인 ‘조’ 아저씨를 찾아낸다. 썸머는 조에게 선물을 주면서 조건을 내세우지 않는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저 인사할 뿐이다.“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라고 노래하는 어른들과 달리 썸머는 왜 괴팍한 조를 선택했을까. 어린이는 알고 있었나 보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산타가 아니라는 걸. 산타는 선물을 빌미로 사람들을 휘두르는 무소불위가 아니라 열심히 한 해를 살아낸 이들에게 다음 해의 희망을 전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라는 것도. 산타가 제 일을 제대로 해냈을 때야 산타 자신까지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될 수 있다.매년 그랬지만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혹독하다. 썸머의 바람대로 우리는 따뜻한 성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산타는 산타답게. 이 간단한 공식이 크리스마스를 모두의 것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김다노 동화작가
- 문화일보
- 2024-12-13 09:57
日출신 영국 이주 노동자… ‘펑크 정신’으로 기득권 직격[북리뷰] 이 책의 작가 브래디 미카코는 그야말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작가다. 인종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그렇다. 후쿠오카 출신의 일본인인 그는 젊어서 펑크록에 심취해 영국을 자주 오가다가, 지금은 아일랜드 이주민 집안의 남자와 결혼해 영국 브라이턴 빈민가에서 살고 있다. 일본에서 음악 칼럼니스트로 잠깐 활동하기도 했고, 영국에서는 자격증을 따서 보육사로 일하고 있다. 영국에서 무직자 지원시설과 빈곤지역 탁아시설에서 일하던 시절, 자신의 일상을 인터넷 블로그에 일기처럼 적다가 우연한 기회에 책을 출간하며 작가가 됐다.일본의 가난한 육체노동자 집안의 딸. 아시아에서 건너와 아일랜드 이주민과 결혼한 이주민. 빈민가에서 더 가난한 이들을 돕고 살아가는 노동자. 혼혈 아이를 키우는 엄마…. 이런 경계의 삶은, 브래디 미카코의 작가로서의 자산인 듯하다. 위치가 다르다면 시야의 각도도 달라지는 법. 일상에서의 경험을 다양한 관점에서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도, 이런 자신의 ‘독특한 사회적 위치’에 힘입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저자가 그간 출판된 단행본의 에세이 일부와 웹진에 연재한 원고, 개인 블로그에 썼거나 잡지에 썼던 기사 등을 꺼내서 다시 편집해 만든 이른바 ‘문고판’이다. 여러 곳의 공간에 발표한 글을 모아 깁듯이 만든 책인 셈인데, 이렇게 가위질해 모아놓은 글의 공통점은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출간한 책과 기고 글, 블로그의 게시물로 가려 뽑은 글은 대부분이 세대와 계급과 빈곤의 문제 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본래 이 책의 일본어판 제목은 ‘음악은, 정치다’였다. 왜 하필 음악일까. 제목에서 ‘음악’이란 영국의 ‘펑크록’이다. 더 확장해서 말한다면 ‘펑크문화’다. 펑크문화는 펑크록에서 유래된 1970년대 청년들의 반항적인 운동이다. 당시 젊은이들은 주류에 편입돼 권위적이고 상업적으로 변한 68세대의 반문화에 반기를 들며 반권위주위, 반소비주의 등을 내세웠다. 책을 관통하는 건 이런 펑크 정신이다. 펑크록 노래나 가수 얘기도 자주 등장한다. 펑크록이 단순하고 직설적이듯, 저자의 발언도 거침없고 주장도 직선적이다. 영국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바라보는 저자의 근원적인 시각은 ‘계급적 구도’다. 긍지와 도덕을 앞세우던 영국의 노동자 계급이 사라지고, 정부에 손을 내밀며 술과 약물에 탐닉하는 밑바닥 사람들만 남은 영국 빈민가의 풍경에 대한 책임이 노동자계급의 공동체를 파괴한 탐욕스러운 자본가와 기득권 정치에 있다고 지목한다. 긴축정책과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가 팽창하던 10년 전의 영국 얘기지만,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무겁게 읽힌다. 384쪽, 1만8000원.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박경일 전임 기자
- 2024-12-13 09:53
“나의 글쓰기는 『□□□』서 출발했다” [북리뷰] 노벨문학상 수락 연설에는 세계가 귀를 기울인다.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가 몇 달에 걸친 고뇌와 퇴고의 과정을 거쳐 응축한 연설문은 인간과 세계를 마주하는 수상자의 자세와 현시대 상황을 관통하는 명문으로 그 자체가 ‘문학’으로 여겨진다. 한강(사진) 작가 역시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깨달음, 이내 “내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이었다는 고백으로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울림을 줬다. 이처럼 ‘사랑’과 ‘다정함’ ‘저항’ ‘침묵’과 같이 시대에 필요한 가치를 전달해온 역대 수상자들의 연설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도 유효하다. 2차 세계대전의 상흔 속에 진실과 자유를 이야기한 카뮈의 연설부터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글쓰기를 시작한 포세까지 노벨문학상 수상자 6명의 수락 연설을 돌아봤다.■ 욘 포세(2023년)“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나는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욘 포세의 세계는 ‘나’에서 출발한다. 지난해 그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발표한 연설에서 중학교 시절 “나라는 존재가 묻혀버렸고 두려움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며 “이 때문에 나는 글을 쓰는 고독한 삶 속으로 발을 들였고 이후로 계속 그곳에 머물게 됐다”고 고백했다. 소설과 희곡, 시까지 넘나드는 그의 광범위한 문학세계는 작가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자 오직 활자만이 존재하는 고요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시도였던 셈이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고 어떤 경우에는 마침표 하나 없이 쉼표로만 이어지는 그의 문장에서 ‘나’는 사라지고 여백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침묵의 발화에 말글을 내주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 그 여백은 글쓰기를 “귀를 기울여 듣는 일”이라는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다.■ 아니 에르노 (2022년)“내 ‘종족’ 여성 목소리 담으려”“문학 속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여성이자 계급탈주자로서의 나의 목소리를 언제나 해방의 장으로 소개되는 그곳, 문학 속에 기입하기 위해서.”아니 에르노의 목소리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향한다. 그의 글쓰기는 ‘나’에서 출발해 “내 종족이 살아온 방식을 밝히겠다는 욕망”으로 나아갔다. 임신중절과 혼외정사 등 그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소설이 곧 “개인을 넘어서고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에 도달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스무 살 무렵 그는 일기장에 “나의 종의 복수를 위해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적었고 그로부터 60년간 남성과 기성 지식인, 프랑스 사회에 맞서는 “자신의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나는’으로 시작되는 말하기가 필요했다”는 그는 “남성 권력을 방해하는 단어를 발견하고 현실 세계를 해독해 기존 언어와 계층구조를 뒤집게 됐다”고 설명했다.■ 올가 토카르추크 (2018년)“초월적이며 사랑스런 장르 꿈꿔”“우리에게는 여전히 언어가 부족하고 새로운 신화나 우화가 부족합니다.”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올가 토카르추크는 단순히 소설가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강연자이자 에코페미니스트, 채식주의자, 사회운동가로서 “세상은 우리가 날마다 방대한 분량의 정보와 토론, 영화, 책, 온갖 소문과 에피소드들을 엮어서 직조하는 일종의 거대한 직물”이라고 진단했다. 인간 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그다운 해석이다. 그가 강연을 통해 묘사한 세계는 미디어의 발전 속에 가짜뉴스가 넘쳐나고 “증오의 표현들이 범람하면서 모든 ‘좋은 소식’과 필사적으로 대적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새로운 유형의 서술, “다정한 서술자”의 등장을 꿈꾼다. “가장 모호한 직관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 문화적 이질성을 뛰어넘는 은유, 그래서 방대하고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독자들이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장르”를 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2017년)“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분투”“나는 그 세계의 특별한 색채를, 풍습을, 예절을 종이 위에 기록하고 있었습니다.”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영국으로 이주한 ‘경계인’이다. 자연스럽게도 그의 문학에는 기억에는 선명하게 남아있지 않은 조국인 일본을 향해 있었고 그의 세계 또한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일본이었다. “집에는 다른 규칙, 다른 기대감, 다른 언어가 있었다”는 그는 “내가 실제로는 한 번도 일본에 간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 나라에 대한 상상을 더욱 생생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노벨상 수상 후 털어놨다. 소설 속에서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분투하는 개인들”의 모습은 결국 자신이 겪었던 망각에서 시작됐다. 그는 “노퍽의 그 작은 방에서 나에게 글을 쓰도록 몰아붙인 것이 ‘나의’ 일본이 유일한 동시에 자칫 깨지기 쉽다는 외부적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느낌이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82년)“비참하지만 아름다워… 창작의 샘”남미 문학의 정점으로 불리는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세계는 ‘창작의 원천’이자 ‘영감의 샘’이었다. 그가 살았던 라틴 아메리카는 다섯 번의 전쟁과 열일곱 번의 쿠데타를 겪었는데 그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마술적 리얼리즘’을 보여준 그의 소설은 “단지 문학적 표현 양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공할 만한 현실”이었다. 마르케스는 스스로 수상 연설을 통해 “비참하지만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고갈되지 않는 창작의 샘물을 솟구치게 하며, 이런 창조적 샘물을 지닌 콜롬비아 사람은 행운아임을 지적하고자 한다”며 그다운 위트를 잊지 않았다. 이어 그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약탈, 절망에 맞선 우리의 대답은 바로 삶”이라며 “모든 것을 믿는 우화의 창조자인 우리는 그것과 반대되는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실행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알베르 카뮈 (1957년)“역사를 겪는 사람들 위해 봉사”“작가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를 겪는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알베르 카뮈가 당대에 겪어낸 참혹함은 어쩌면 지금보다 컸을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은 프랑스에서 그가 허무와 폐허 속에 ‘예술’의 필요성에 대해 고민한 흔적은 수상 연설문에도 남아있다. 그가 꼽은 예술가가 짊어져야 할 두 가지 능력은 ‘진실에 대한 섬김’과 ‘자유에 대한 섬김’이다. “우리는 오늘날엔 핵무기에 의한 파괴의 위협을 받는 세계 속에서 우리의 자식과 작품을 길러 나가야 한다”며 자신의 작품, 그가 “지금도 그 덧없으나 자유로웠던 행복의 추억이나 소생”이라고 일컫는 ‘이방인’과 ‘페스트’ 같은 시대의 명작이 “이 세상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을 겨우 견디고 있는 그 모든 말 없는 사람들 곁에 남아 두 눈 질끈 감고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보냈다.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 신재우 기자
- 2024-12-13 09:41
노벨상 별들의 말과 문학정신 책으로 만난다 [북리뷰] 노벨문학상 수락 연설은 작가의 내면세계와 문학 정신, 그리고 인류와 세상을 향한 메시지까지 응축한 글이다.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그래서 종종 책으로도 선보인다. 국내에서 그 시작은 한국인의 수상이 요원하던 2009년, 알베르 카뮈, 오에 겐자부로, 오르한 파묵 등 10인의 수상 연설을 모은 ‘아버지의 여행가방’(문학동네)이다. 표제는 2006년 파묵의 연설 제목에서 가져왔으며, 귄터 그라스, 주제 사라마구 등 주로 1990∼2000년대 수상 작가들을 선별했다. 2023년 수상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의 연설문은 짧은 소설 ‘샤이닝’(문학동네)과 함께 실려 있다. 소설은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어둡고 깊은 겨울 숲에 고립된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뒤에 따라붙는 연설 ‘침묵의 언어’가 소설의 사색적·묵시적 분위기를 배가한다. 읽는 행위가 어떻게 ‘묵상’이 될 수 있는지 경험하게 해주는 책이다. 2022년 수상한 프랑스의 아니 에르노의 연설문은 단편 ‘젊은 남자’(레모)의 별책부록으로 제작됐다. 미완성 상태였던 소설은 노벨문학상 수상 후 발표되는데, 에르노가 50대에 경험한 20대 남성과의 연애를 회고한다. 연설문은 개인적 경험으로 사회·정치적 문제까지 드러내 온 에르노의 저력과 매혹적인 문학세계를 살피게 한다.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초청돼 눈길을 끈 2018년 수상자인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 그의 연설문은 동명의 산문집 ‘다정한 서술자’(민음사)에서 만날 수 있다. 코로나19로 봉쇄령이 내려졌을 때, 그동안 써 온 글과 강연에서 작가가 직접 12편을 골라 엮었다. 첫 에세이기도 한 책에는 “글쓰기엔 다정함이 필요하다”고 한 토카르추크의 철학이 일관되게 흐른다. 민음사에서는 2017년 수상한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연설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을 아예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작가 연보, 옮긴이가 전하는 해설 등 이시구로의 독자라면 탐낼 만한 구성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은 아니지만, 수상 작가들의 글쓰기론과 문학론, 생각과 신념을 읽어낼 수 있는 책들도 있다. 작가들의 ‘말’ 자체가 콘셉트로 기획된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가 대표적.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는 ‘시대의 지성’인 작가를 작품 밖에서, 보다 가깝게 만나는 경험이다. 꾸준히 사랑받는 시리즈로, ‘카뮈의 말’ ‘헤밍웨이의 말’ ‘아니 에르노의 말’ ‘토니 모리슨의 말’ 등이 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 박동미 기자
- 2024-12-13 09:20
“기업가정신은 변화 원동력… 누구나 발휘할 수 있어” “‘기업가정신’은 창의와 혁신, 변화의 원동력이며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발휘되고 실천될 수 있습니다.”김용열(왼쪽 사진) 전 홍익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는 최근 출간한 ‘기업가정신 블랙박스’(퍼플 출판·오른쪽)를 두고 12일 이렇게 말했다. 산업연구원과 홍익대에서 오랫동안 ‘기업가정신’을 연구해온 그는 “혁신과 창조를 위해 기업가정신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가정신이 비단 창업자나 기업인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 자영업자, 과학자, 연예인, 주부 등 각종 직역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광범위하게 보여지며 누구나 기업가정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내년부터 중·고등학교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시의성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책에서는 정주영 현대 창업자,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같은 기업가들뿐 아니라 충주시 홍보맨 김선태 주무관, 요식업계 대부로 불리는 백종원, 가수 겸 프로듀서 JYP(박진영),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등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기업가정신을 보여준다. 또 기업가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도 제시한다. 지난해 정년퇴임 후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 전 교수는 카카오 플랫폼 등에 은퇴 생활에 대한 글을 써서 독자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 김지은 기자
- 2024-12-12 11:42
스웨덴 127년 된 유서깊은 책방에도 ‘한강 물결’ 스톡홀름(스웨덴)=장상민 기자, 박동미 기자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을 앞둔 10일(현지시간) 현재 스웨덴 스톡홀름은 온통 ‘한강 물결’이다. 공항 서점에서부터 유서 깊은 작은 책방, 가장 큰 대형서점에 이르기까지 한강의 작품들로 가득찼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한 작가에 대한 존경과 지지, 동시에 노벨문학상의 권위와 영향력을 체감할 수 있다. 한국시간 10일 밤 12시에 열리는 시상식에서 한 작가는 또 어떤 메시지를 전해줄까. 지난 7일 강연에서 노벨상 수상 작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한 한강. 그가 ‘문학상 메달’을 걸게 될 시상대의 풍경과 그의 ‘입’에 다시금 이목이 쏠리고 있다. 2024 노벨상 시상식은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시상식의 상징은 파란색 카펫.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이 이를 밟고 입장하면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연주되고, 수상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통상 이 행사엔 남성은 연미복, 여성은 이브닝드레스를 입어야 하지만, 자국의 전통의상을 입는 것도 가능하다. 시상식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상하는 평화상을 제외하고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경제학상 순서로 진행된다. 각 부문 수상자에게 스웨덴 국왕이 직접 메달과 노벨상 증서를 건넨다. 올해 문학상 시상 연설은 스웨덴 한림원의 종신위원 18명 중 수상자 선정에 참여한 스웨덴 소설가 엘렌 맛손이 담당한다. 증서에는 매년 다른 삽화가 들어간다. 특히, 문학상의 증서는 양피지로 제작돼 다른 상과 차별화된다. 시상식 후 스톡홀름 시청에서 연회가 펼쳐진다. 청사 내에서 열리는 연회에는 국왕과 수상자들, 노벨 재단과 한림원의 주요 인사 등 1300여 명이 참석한다. 마무리 무렵에 시작되는 수상자들의 소감 발표가 이날의 하이라이트다. 수상자들의 공식 발언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으로, 한 작가가 또 어떤 말로 언어의 힘과 무게를 느끼게 해줄지 주목된다.노벨문학상과 한 작가에 대한 열광적 관심은 스톡홀름 시내 곳곳에서 확인된다. 유명 관광지 감라스탄 중심부에 위치한 ‘감라스탄 서점’은 한 작가의 책들을 가장 잘 보이는 장소에 배치했다. 서점 대표는 “노벨상 수상 이전부터 ‘채식주의자’는 스웨덴 문학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책이었다”고 말했다.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책방으로 1897년 설립된 ‘히덴그렌스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도 한강의 ‘채식주의자’이다.한 작가의 성취에 경의를 표하는 행사에도 사람들이 북적인다. 8일 오후에는 시청 맞은편에서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글을 그들의 모국어나 스웨덴어로 읽는 ‘문학의 밤’이 열려 의미를 더했다. 한 작가의 모교 연세대에서 파견한 학생 방문단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한 작가는 여러 행사에 참석하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 왔다. 지난 6일엔 노벨상박물관에 애장품인 작은 찻잔을 기증했다. 이어 7일 ‘수락 연설’로 볼 수 있는 강연을 하고, 8일엔 ‘노벨상 콘서트’를 관람했다. 9일엔 ‘말괄량이 삐삐’로 잘 알려진 스웨덴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의 생가를 방문해 증손자 요한 팔름베리를 만났다.한편, 10일 오전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노벨상 수상자 초상화 전시공간에는 한 작가의 초상화가 걸렸다. 이 공간에 새로운 초상화가 걸린 것은 10여 년 만이다.joseph0321@munhwa.com
- 장상민 기자 외 1명
- 2024-12-10 11:52
“한 단어도 버릴게 없는 작품들, 100% 번역에 노력” 스톡홀름(스웨덴)=글·사진 장상민 기자“‘채식주의자’가 영미권에 한강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었다면 스웨덴에서는 ‘작별하지 않는다’죠.”스웨덴 스톡홀름의 주스웨덴 한국문화원에서 8일(현지시간) 만난 박옥경 번역가와 안데르스 칼손 영국 런던대 교수는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부부인 두 사람은 한국어와 스웨덴어를 모국어로 가졌다는 강점을 살려 끊임없는 논의를 통해 ‘흰’과 ‘작별하지 않는다’를 공동 번역했다. 스웨덴 한림원 소속 위원들이 스웨덴어 번역본, 그중에서도 원어 직역본을 중요한 읽을거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번 수상의 일등공신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번역가는 “한강의 소설은 차분한 어조로 인간의 본성을 다룬다”며 스웨덴 한림원의 평가이기도 한 ‘강렬한 시적 산문’에 대해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작별하지 않는다’는 “눈과 밤 등 스웨덴 사람들에게 익숙한 풍경을 그려내는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칼손 교수는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듯 서술된 한강의 소설은 스웨덴 독자들을 깊이 몰입하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이들의 말처럼 한 작가의 작품은 고도의 예술성뿐 아니라 스웨덴 문학 독자들에게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중이다. 특히 ‘작별하지 않는다’는 올해 ‘스웨덴 독자가 선택하는 도서상’ 문학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있다. 오는 10일까지 진행되는 온라인 투표 결과를 종합해 내년 1월 30일 발표된다.박 번역가와 칼손 교수는 “‘시적 산문’을 번역하는 일이란 그 리듬이 가지는 이미지를 제대로 번역해야 한다는 뜻인 동시에 숨겨진 주어와 목적어를 찾아내는 일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모든 작품의 번역이 까다롭지만 한 작가는 단어 하나도 그냥 쓴 게 없어서 100%를 옮기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두 사람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한-스웨덴어 문학 번역이라는 불모지를 개척해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고 있다. 지난 7일 진행된 한 작가의 특별 강연 원고를 스웨덴어로 번역했으며 10일 시상식에서 한 작가를 무대 위로 불러낼 한국어 소개글도 작성했다. 아울러 스웨덴 출판 시장이 한국 작품의 경향을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해왔다. 최근에는 “강지영, 연소민 등 신예 작가의 소설까지 직접 발굴해 요약 의뢰를 맡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문학 번역본을 짊어지고 다니며 책을 내달라고 제안하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현지 출판사가 욕심나는 작품을 내기 위해 대기하고 있어요.”
- 장상민 기자
- 2024-12-10 11:52
스피커선 ‘채식주의자’ 들리고… ‘흰’상징 드레스도 전시 스톡홀름(스웨덴)=장상민 기자노벨상을 제정하도록 막대한 유산과 유언을 남긴 알프레드 노벨의 삶과 노벨상의 역사, 무엇보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기증품을 소장하고 있는 ‘노벨박물관’은 스웨덴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방문해야 할 명소로 꼽힌다. 지난 7일(현지시간) 직접 찾은 노벨박물관 곳곳에는 한강 작가의 흔적으로 가득했다.박물관의 중심에는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을 소개하는 기기가 설치돼 있다. 그곳에서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한강에 대한 칭송과 함께 그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 일부분을 노벨이 발명한 전화기 형태의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다. 또한 한쪽에는 지난 6일 기증된 올해 수상자들의 기증품들이 놓여 있다. 한 작가는 이번에 작은 찻잔을 내놓았다. 함께 전시된 쪽지에는 기증의 이유, 집필 과정 등이 소개돼 있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소설을 썼고, 하루 한 번 이상 천변을 걸었으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을 때마다 직접 우린 홍차를 한 잔씩 마셨다는 것 등이 한 작가가 밝힌 ‘루틴’이다. 그는 “하루에 예닐곱 번, 이 작은 잔의 푸르스름한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이 당시 내 생활의 중심이었다”고 적었다. 기증 이유를 밝힌 글을 물건과 함께 전달한 것은 이례적이다. 또한 한 작가의 기증품 앞에는 스웨덴 최고의 현대 디자인 교육기관인 ‘베크먼스 디자인 칼리지’에서 한강의 수상을 기념해 제작한 드레스도 눈길을 끈다. 마치 한강의 작품 ‘흰’을 형상화한 듯한 이 드레스는 오직 흰색과 검은색만을 사용해 제작됐다. 박물관 측은 “(그의 작품이 그렇듯) 안도감과 고통을 함께 표현하려 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한강의 사진이 가장 크게 들어간 한정판 포스터를 증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 장상민 기자
- 2024-12-10 11:52
“상대를 악마화 시도하며 자신의 증오·혐오 정당화… 비극 싹터” “윤석열이 조국을 수사했던 방식 그대로 자신이 외쳤던 ‘공정과 상식’의 원칙을 집권 후에도 계속 실천했다면, 특히 자신의 아내 김건희에 대해 그렇게 했다면 윤석열 정권에 대한 증오와 혐오의 열기는 가라앉기 시작했을 것이다.”여야를 가리지 않고 쓴소리를 해온 원로급 논객인 강준만(사진)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는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 이같이 평가했다. 최근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2010년대 편’을 통해서 그는 증오로 시작됐던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을 능가하는 내로남불의 화신처럼 행세함으로써 오히려 증오와 혐오의 열기를 뜨겁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며 이를 ‘비극’이라고 표현했다.강 교수는 책을 통해 201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증오와 혐오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그는 “반대편이 증오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한 ‘악마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증오와 혐오를 정당화한다”며 이 과정에서 “정치가 종교가 됐다”고 말했다. 역사가 반복된다지만 책에 언급된 현대사에는 ‘증오와 혐오’를 오가며 유독 되풀이되는 사건들이 있다. 이를테면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시작된 탄핵 사태다. 강 교수는 “‘박근혜 게이트’에 분노한 민심의 가장 큰 수혜자는 성남시장 이재명이었다. 그는 이 집회에서 한 연설로 ‘최초로 박근혜 하야를 주장한 대권 주자’라는 타이틀을 얻으면서 대선후보로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며 현 정국의 중심에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해 언급했다. 강 교수는 문재인 전 대통령 또한 ‘증오 정치’의 동조자라고 봤다. 그는 문 전 대통령에 대해 “스스로 손에 더러운 걸 묻히지 않으려는 소극성을 보이면서 착하고 선하고 인자한 표정만 지어 보였지만 그는 강성지지자들의 행태를 지지하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사실상 경쟁자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을 강화했다”고 평가했다. 반복되는 탄핵 정국과 심화하는 정치적 양극화 속에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공감 자제’다. 강 교수는 현 세태의 문제를 ‘선택적 과잉 공감’이라고 짚으며 “증오와 혐오를 위한 공감보다는 증오와 혐오가 없는 냉정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2년 1970년대 편으로 시작한 ‘한국 현대사 산책’은 최근 2010년대 편 5권까지 총 28권으로 완간됐다.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 신재우 기자
- 2024-12-1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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