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윤의 스포츠인생>감독 맡고 첫 다짐이 ‘성질 죽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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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당신은 영웅입니다. 젊고 자만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부터 겸손의 미덕으로 우승하던 그 눈물까지, 비록 다른 길, 다른 삶, 다른 세대지만 전 당신 덕분에 기뻤고, 당신의 플레이에서 도전과 진화를 배웠습니다. 당신은 나의 영웅입니다.”(허재가 현역시절 TG 삼보엑써스에 있을 때 팬이 팀 홈페이지에 올린 글) 스타가 즐비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허재는 진정한 스타였다.

그가 가진 농구의 기술보다는 농구에 대한 열정이 그를 스타로 만들었고 치열한 삶은 다른 길을 걷는 인생에 감동을 줄 수 있었다. 국내 농구선수로는 처음으로 40세까지 코트를 지켰던 허재는 2004년 5월 2일 고별경기를 끝으로 무대에서 사라졌다. 미국에 지도자 연수를 떠났던 그는 1년 후 전주 KCC 이지스 감독으로 선임돼 지도자로 다시 무대에 섰다. 초보감독으로 한 시즌을 마친 그를 지난 3일 경기 용인시 마북리의 현대인력개발원에 있는 농구단 숙소에서 만났다.

언젠가는 지도자로 돌아올 것을 알았지만 예상보다 빨랐다. “감독을 맡아 달라는 전화를 받고 솔직히 기뻤습니다.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나 곧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어떻게 팀을 이끌고 갈지. 우선 스스로 다짐한 것은 ‘성질을 죽이자’는 것이었어요. 내가 성질이 불 같이 급한데 팀을 위해서는 성질을 죽이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감독으로서의 허재는 선수 때와는 달랐다. 실책이 나오면 펄펄 뛰었던 선수시절과는 달리 미소를 지었고 슛이 빗나간 선수들에게는 “자신 있게 쏘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그러는 허 감독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속으로 화를 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을 맡으면서 그는 승부세계의 살벌함을 뒤늦게 느낀 것 같다. “후배가 원정 오면 술도 사주고 이야기도 나누는 그런 풍토가 됐으면 합니다. 10개 구단 감독이나 선수는 모두 다 동업자입니다. 그런 동류의식 없이 승부만을 다투면 농구 판은 곧 팬들에게 외면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초보감독이라도 이기는 방법은 압니다. 간단하죠. 상대팀 주요선수를 (심판 몰래 침 뱉고 때리며) 괴롭히면 됩니다. 하지만 그러면 농구 자체가 죽습니다. 저는 우리 선수들에게 상대가 멋진 플레이를 하면 오히려 (막지 말고) 놔두라고 했어요.”

허 감독이 35세 때 농구 전체를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문득 모든 선수들은 ‘동업자’라는 생각이 들데요.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상(賞)이 뭔 줄 아십니까. 최우수선수(MVP)상보다는 2002~2003시즌에 받은 모범선수상입니다. 일부러 그 상을 꼭 받고 싶어서 그 해는 테크니컬 파울 하나라도 받지 않으려 애썼어요.”

허재는 카리스마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그의 카리스마는 후배들을 무섭게 다룬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선천적인 리더십, 유머, 거침없는 화술 그리고 놀 때는 후배들과 친구 같이 놀아주는 화통한 성격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가 후배들에게 매를 든 것은 딱 한 번, 용산고 3년 때였다.

“중고교 6년간 전승 우승을 5번이나 했는데 내가 3학년 때 2학년들만 작은 대회에 내보냈는데 지는 거예요. 그것도 용산고 체육관에서 경기를 했는데. 그래서 후배들에게 매를 들었죠. 그것 한번 외에는 없어요. 저는 선천적으로 기합 받는 걸 싫어해요. 내가 왜 농구명문이었던 고려대나 연세대를 선택하지 않았는지 아세요?

지금까지 그 질문을 받으면 ‘쇠꼬리보다는 닭대가리가 되고 싶어서’ 또는 ‘농구의 균형 발전을 위해서’라는 식으로 점잖게 답변했지만 처음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매 맞기 싫어서’그랬어요. 고대나 연대가 그 시절 선배들의 ‘빳따’가 아주 심하다고 들었거든요.”

구속 받기 싫어하고 지기 싫어하는 허 감독의 성격은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허 감독의 아버지 허준(75) 씨는 늦둥이로 태어난 허재의 기를 살리기 위해 형들에게 때리는 것은 물론, 윽박지르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다. 허 감독은 동북초등학교 3년때인 1974년 특별활동으로 농구부에 들어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공을 갖고 노는 게 너무 좋아서였다. 농구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안 허준 씨와 가족들은 허재를 위해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결혼해 미국으로 떠난 큰 누나는 드리블 연습용 안경과 특수 장갑을 보냈다. 아래쪽이 보이지 않도록 고안된 안경과 손바닥 쪽이 볼록한 특수 장갑은 허재에게 신기의 드리블 솜씨를 갖게 했다.

“어렸을 때부터 농구를 위해 살았다고 할 수 있어요. 중고교 때 농구를 가르치신 양문의 선생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 분은 모든 것을 농구와 연관시켜 하라고 했어요. 잠을 잘 때도 농구공을 안고 자라고 했고 밥을 먹는 것도 농구를 위해 먹는다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사실 술 마시는 것도 생각해 보면 농구 연습이에요. 술잔 꺾는 게 슛할 때 스냅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소주는 골밑 슛이고 조끼로 들이키는 맥주는 3점 슛이고…(웃음). 사실 어려서는 싫증이 나기도 해 꾀를 부리기도 했어요. 농구를 한다니까 아버지가 집 정원에 농구대를 설치해주셨는데 싫증이 나서 ‘공을 잡아주는 사람이 없어 슈팅연습을 못 하겠다’고 투정을 하니까 다음 날부터 아버지 명령으로 형은 물론 어머니, 누나 등 모든 식구가 공을 주우러 다녔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정원에는 나무가 있어 시야를 가린다’고 변명을 했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정원수가 모두 잘려 나갔더군요. 아버지는 대장암 수술, 당뇨 등으로 고생하시면서도 내가 미국 연수 중일 때 ‘나중에 감독하려면 국내 경기를 봐야 한다’며 프로농구 경기를 모두 비디오로 떠서 보내주셨을 정도로 영원한 나의 후원자시죠.”

동북초교 농구팀이 1년 만에 해체돼 상명초교로 전학해 농구를 계속한 허재는 1978년 용산중에 입학해 양문의 감독을 만나게 된다. 양 감독은 엄청난 훈련 량과 엄격한 선수관리로 용산중고 농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 기본기와 조직력을 중시하는 스타일이었던 양 감독은 허재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그에게만큼은 올라운드 플레이를 허용했고 이는 곧 허재가 농구천재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중앙대가 허재를 낚을 수 있었던 것은 자체 체육관이 없어 용산고 체육관에서 훈련을 했던 덕(?)이었다. 중앙대 정봉섭 감독은 허재가 중1때부터 허준 씨와 자주 얼굴을 마주쳤고 나중에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친해져 손쉽게 허재를 끌어갈 수 있었다.

선수 층이 두꺼운 고대나 연대에 갔더라면 허재의 천재성이 일찍 발휘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중앙대는 1984년 허재가 입학한 후 대학농구 전관왕에 올랐다. 허재가 2학년이 되었을 때 중앙대는 현대전자와 삼성이라는 양웅(兩雄)이 다투던 농구대잔치 2차 리그에서 우승, 실업무대까지 평정하는 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랬던 허재였지만 그는 자신의 전성기가 실업팀 기아에 입단한 후 두 시즌까지였다고 실토한다. “대학 때까지는 힘으로 농구를 했고 실업팀에 와서 2년까지가 힘과 테크닉이 조화를 이룬 최전성기였다고 봐요. 이후에는 노련미로 커버했지, 사실 체력적으로 아주 힘들었어요.

1998년 스스로 원해 기아에서 나래(TG 삼보의 전신)로 옮긴 것은 ‘농구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팀 내부에서 강동희, 김영만이 치고 올라오지…. 팀을 옮겨서 뭔가 보여주고 농구를 끝내겠다는 생각에서 트레이드를 자청했죠.” 허재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그는 후배 중 김주성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마흔까지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성이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죠. 주성이 부모님이 장애인인데 나 같으면 감추고 싶었을 텐데 주성이는 오히려 앞세웠어요. 후배지만 존경하기도 해요.”

국가대표 15년, 올림픽 3회 출전 등 농구선수로는 다 해본 허재에게 남은 소원은 딱 한 가지. 국가대표 감독이 돼서 중국을 한번 꺾어 보는 것이다. “청소년대표 때 중국을 꺾고 우승한 적이 한번 있지만 성인 국가대표로는 한번도 중국 벽을 넘지 못했어요. 감독으로라도 중국을 꺾어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이동윤 체육부장dy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