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윤의 스포츠인생> “女배구 16년 184연승 대기록… 훈장이었지만 큰 짐”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의원 개원을 준비중이라는 이창호씨는 “여자배구 프로팀이 생긴다면 한 3년 맡아 우승시켜 보고 싶다”고 했다. 심만수기자

스포츠는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뛰는 전장(戰場)이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각축장이기 때문에 오랜 기간의 연승기록은 대단한 가치를 갖는다. 국내 스포츠에서 최다 연승기록은 여자배구 미도파의 184연승이다. 배구계에서는 세계최고기록이고 다른 종목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록이다.

1969년 국세청으로 시작, 대농-미도파로 팀 명칭이 바뀌면서 이어진 이 기록은 무려 16년간에 걸쳐 달성됐다. 16년간 기록의 주인공인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했지만 단 한 사람만은 바뀌지 않았다. 사령탑 이창호(65)씨였다. 국내 체육인중 처음으로 기업체 임원 승진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한 그는 현재 대한배구협회 부회장 겸 대한한의사협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3시40분 문화일보로 오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1분1초도 어기지 않고 정시에 모습을 보였다. 이같은 철저함이 대기록의 밑거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양 출신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월남했다. 1·4후퇴 당시 온 가족(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누나 4명)이 외가 식구들과 3진으로 나뉘어 피난길에 올랐는데 두 번째로 출발한 누나 2명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경기 시흥까지 걸어 내려왔을 때 중공군을 만나 가진 짐을 모두 뺏겨 빈손으로 안양의 피난민촌에 정착했다. 큰 누나가 안양유원지에서 장사를 해 살림을 꾸렸다. 그는 안양고등공민학교를 다니다 서울 인창고에 진학했는데 큰 키(1m78)가 눈에 띄어 배구부에 들어갔다. 선수시절 포지션은 라이트공격수. 대학은 배구팀이 있던 동양의약대학(경희대 전신)에 들어갔다.

“당시는 한의사가 별로 인기가 없어 약학과를 원했는데 한의학과로 배정됐어요. 배구 선수출신이라고 ‘돌팔이’는 아닙니다. 국가고시에 당당히 합격했고 실제 3년간 개원하기도 했으니까.”

생활력이 강한 이북출신어서인지 그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최고라는 생각에 대학4년 때는 코치에게 혼나면서도 공부에 열중했다. 국가고시를 앞두고는 3명이 함께 절에 들어가 합숙을 하기도 했다.

졸업 후 그는 서울 한남동에서 1년간 월급쟁이 한의사를 했고 이후 서교동에 ‘삼진한의원’을 개업했다. 그가 배구계로 돌아온 것은 국세청이 여자배구팀을 창단한 68년이었다.

“청장이셨던 이낙선 씨가 회식자리에서 ‘국세청의 대국민 이미지가 너무 강해 쇄신차원에서 여자배구팀을 창단했다’고 말씀하는 것을 들었어요. 감독은 4년 위인 박만복 선배였고. 당시 한의사 수입이 좋았으면 코치로 갔겠어요? 우승하면 보너스까지 있어 한의원하는 것보다 수입 면에서 코치가 훨씬 나았죠.”

창단 초기 여자배구판도는 김영자 문경숙이 포진한 제일은행이 최강이었고 다음으로는 서한숙, 서현숙이 버틴 산업은행이었다. 숭의여고와 중앙여고 졸업반 학생들로 팀을 구성한 국세청은 최약체였는데 창단 첫 해 실업연맹전에 나가 제일은행과 데뷔전을 치러 0-3으로 완패했다.

“그런데 우리 팀이 결승까지 올라 제일은행과 재대결했는데 3-0으로 이겨 덜컥, 우승했어요. 도하 각 신문의 체육 면 톱기사에 오를 만큼 대 이변이었죠. 아마 상대의 방심과 신생팀의 패기가 이변의 원인이었겠죠.”

69년 박만복 감독이 퇴진하고 그는 감독대행으로 승진했는데 제일은행팀이 해체되면서 스타플레이어 김영자를 스카우트했다.

“실업연맹 2차 대회부터 연승기록이 시작됐죠. 너무 많이 우승하면 안 되니까, 전국체전은 일부러 출전하지 않는 등 대회를 골라 나갈 정도였어요. 하지만 결국너무 강해 팀이 해체되고 말았죠. 오정근 청장시절인데 ‘배구팀이 너무 세, 국세청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다’며 팀을 없애기로 하고 73년 대농에게 넘겼어요. 국세청이 무적의 팀이 된 것은 조사국장이나 징세국장인 이철승, 장태명 씨 등이 단장, 중부 세무소장 차영복 씨가 매니저 겸 부단장을 맡아 막강한 지원을 했고, 팀이 강하니 감독이 나서 스카우트를 할 필요도 없이 지명만 하면 우수선수가 그냥 들어왔던 게 힘이 됐죠.”

하지만 팀은 감독이 가꾼다. 감독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어떻게 작용했을까.

“1·4후퇴 때 남들은 기차나 차를 얻어 타기도 하면서 왔지만 우리는 철길을 따라 쭉 걸어왔어요. 어렸을 때지만 이 경험 때문에 지금도 생활 모토가 ‘최선을 다하자’입니다. 연승기록을 쌓으면서 옆이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냥 앞만 보고 달렸어요. 그리고 한의사라는 게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됐죠. 감독은 선수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상당하면 내가 직접 치료하고, 한의사를 할 때 손님의 대부분이 여성이어서 여성의 심리를 잘 아니까 이를 최대한 이용해 선수들을 다뤘죠. 선수들에게 ‘감독보다는 아버지 같다’는 말을 들었죠.”

하지만 16년간 이어진 무패기록은 허무하게 끝났다.

“1985년 광주에서 열린 종별대회 약체로 분류되던 선경하고의 경기였지요. 경기에 앞서 몸을 푸는데 우리 팀 주공인 김화복이 뒤에 있던 공을 밟아 발을 심하게 접질렸어요. 팀 분위기가 푹 처지는 등 조짐이 이상하더라고요. 이운임 등 초년병들을 대거 투입했는데 1세트를 18-20으로 내줬지요. 상대 사기가 오르면서 2세트도 내주고 3세트는 듀스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0-3으로 졌어요.

회사에서 놀라서 사장과 단장이 광주로 내려왔어요. 나를 위로한다고 저녁을 하며 마주앙을 마셨는데, 아 포도주 석 잔에 내가 인사불성이 됐어요. 그만큼 연승에 대한 압박감과 부담감이 컸었던 모양입디다. 아침에 깨고 나니 그렇게 컨디션이 좋을 수 없어요. 차라리 후련하데요. 연승기록은 깨졌지만 그 대회는 우승했죠. 김화복이 붕대를 감고 출전하는 투혼을 보이고…,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그 뒤에도 다시 27연승인가 했는데 한번 깨진 기록이라 다시 세기도 싫고 의미도 없어서….”

그는 평소 ‘200연승을 이루면 배구계에서 은퇴하고 다시 한의원을 열겠다’고 공언해 왔으나 이 패배로 배구판을 떠나지 못했다.

“실제 이문동에 개업하려고 땅까지 사놓고 준비를 해왔는데 떠나지 못했죠. 승부의 세계라는 게 힘들지만 묘미도 있어요. 95년 미도파가 해체됐을 때가 사실 개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선수들 때문에 다시 무산됐어요. 나라 전체의 경제사정이 좋지 못해 신생팀이 생기지 않고, 그래서 기존 팀인 효성과 접촉해 ‘나는 그만두겠으니 선수들을 받아달라’고 했는데 감독만 오라는 거예요. 결국 선수들과 함께 효성으로 옮겼죠.”

요즘은 임원으로 승진한 운동선수들도 많지만 70년대만 해도 편견 때문인지 지도자들은 대부분 계약직이 많았다. 이 씨는 운동선수로는 처음으로 대기업의 별을 달았다.

“국세청에서 대농으로 옮길 때 과장으로 들어갔는데 8년만인 36살 때 이사대우가 됐어요. 농구의 이인표 씨 등도 나중에 내 덕에 이사 승진을 한 것 같다고 하데요. 미도파에서 상무까지 했었죠.”

그는 33살 때인 73년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최연소 국가대표 감독 기록도 갖고 있는데 1년 후배인 전호관(전 현대 감독)씨와 1년 간격으로 대표 감독을 교대로 맡기도 했다. 이창호와 전호관의 라이벌 관계는 여자배구의 인기를 높이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전호관(부산고-성균관대)씨와 나는 스타일이 정반대였어요. 그는 키가 작아 선수시절 수비수였는데 이에 대한 역작용 때문인지 호쾌한 공격배구를 지향했고 나는 공격수 출신이지만 수비를 우선시 했죠. 이창호는 관리의 배구, 전호관은 공격배구라고 주위에서 이미지를 구별해 라이벌 관계가 북돋았죠.

요즘 배구인기가 떨어진 것도 그동안 우리 같은 라이벌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다행히 김호철(현대캐피탈) 감독이 돌아와 신치용(삼성화재) 감독과 선의의 라이벌을 이뤄 배구인기가 좀 올라갈 것 같아요. 팬들에게는 선수들의 기술뿐만 아니라 감독의 카리스마 같은 것도 볼거리입니다.”

배구감독출신 한의사라고 한의사협회 일을 보는데 득이 된다는 그는 “여자 프로팀이 생긴다면 한 3년 계약할 뜻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다시 한의사로 돌아올 것”이라고 웃었다.

체육부장 dy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