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포커스>이론가들 사상논쟁…한국 지식사회 ‘백가쟁명’

진보와 보수 간의 사상 논쟁인가, 내년 대선의 전초전 성격을 띤 지식 권력의 세력다툼인가. 한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논쟁이 불꽃을 튀기고 있다. 비판 대상자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맹렬히 공격을 퍼붓는 실명 비판이 점입가경이다. 특히 최근의 흐름은, 단순히 보수 대 진보 진영 간의 대결이 아니라 각 진영 안에서도 서로 주장을 달리하며 대립각을 세워나가는 형국이다. 가히 백가쟁명의 시대라 할 만하다.

이같은 ‘사상 논쟁’은 자칫 상대방에 대한 치명적인 인신공격성 비난으로 흐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전통적인 좌·우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통합적인 이론 창출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난달 30일 서울대에서 열린 교과서포럼 심포지엄에선 4·19 혁명동지회와 유족회 등 관련단체 회원들이 포럼 참가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4·19를 혁명이라 하지 않고 학생운동으로 격하했다”는 게 관련단체 회원들의 항의 요지였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뉴라이트 계열로 분류되는 교과서포럼 소속 회원들의 주장에 대해 같은 계열의 다른 단체에서 비판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연대(대표 신지호) 등 뉴라이트 5개 단체들은 이날 ‘교과서포럼 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내고, 교과서포럼의 ‘한국 근현대사 대안교과서 시안’에 대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교과서포럼의 시안은 기존 교과서의 좌편향을 바로 잡으려다 역편향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산업화에 대한 지나친 미화와 민주화에 대한 평가절하라는 오류와 편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진보·보수 진영 안에서 소속단체의 입장에 따라 세부적인 주장을 달리하는 현상은 각 진영의 ‘대표 선수’로 꼽히는 학자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27일 발간된 계간지 ‘시대정신’ 겨울호에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분단체제론’에 대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며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기고문의 제목도 ‘허구로서의 분단체제’. 한마디로 백 교수의 분단체제론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맹비난이었다. ‘시대정신’은 지난 가을호부터 아예 ‘우리시대의 진보적 지식인’이란 코너를 마련, 진보진영 소속 대표 주자들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하고 있다.

첫번째로 도마 위에 오른 학자는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최홍재 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은 “(강 교수는) 탈북자들의 진실도 거부하며 김정일에 복무하는 어용이 되어가고 있다”면서 “강 교수의 가장 큰 오류는 친일세력과 분단세력, 냉전세력을 하나로 보고 있다는 데 있다”고 주장,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진보 진영의 반박도 만만찮다. 백낙청 교수는 계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서 안병직 교수를 겨냥, “한반도의 전쟁 위협이 고조되고 북의 모험주의적 행동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과연 한국의 선진화가 가능할까”라고 비판했다. 즉 6·15남북공동선언을 폐기하고 남한의 선진화에 주력해야 한다는 안 교수의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백 교수는 특히 같은 진보 진영의 최장집 고려대 교수에 대해서도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지난 5월 출간된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형형’이라는 저서에서 백 교수는 최 교수의 ‘평화우선론’에 대해 “분단체제를 간과한 채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주장”이라고 공격했다. 또 최 교수의 ‘민주주의 위기론’에 대해서도 “민주화 세력의 집권으로 대한민국이 망가졌다는 보수 세력의 결론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가하면, 중도 성향으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논쟁 가담도 눈에 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지난 5월 “정통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훨씬 앞선 남과 그렇지 못한 북을 부당하게 등질화하고 있다”며 백 교수의 분단체제론을 비판했고, 지난달에는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를 겨냥, “자본주의 우상을 부순 자리에 사회주의의 우상을 세웠다”며 조목조목 허점을 지적했다.

이밖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둘러싸고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와 안병직 교수가 충돌했으며,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신 교수는) 1990년대 이후 연구 성과를 무시하고 있다”며 한몫 거들고 나서기도 했다.

또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싼 논쟁도 점입가경이다. 1980년대의 베스트셀러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판하며 지난 2월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최근엔 ‘한차원 높은 패러다임’을 자처한 ‘근대를 다시 읽는다’가 출간돼 ‘재인식’의 시각을 맹공하기도 했다.

‘근대를…’의 책임편집을 맡은 윤해동 성균관대 교수는 “‘재인식’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그리고 낡은 사고방식, 곧 ‘(근대)국가는 문명의 상징’이고 ‘민족은 전근대적 야만의 상징’이라는 이분법이 깔려 있다”면서 “이 논리가 ‘대한민국=문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야만’이라는 사고를 정치적 배후이자 ‘의도’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황당하다”고 평했다.

이같은 한국 지식계의 논쟁에 대해 대부분의 관전자들은 “상대에 대한 비난에서 벗어나 보다 깊이 있는 내용으로 채워질 때 좌·우 이분법적 인식의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평을 내놓고 있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