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생각하며>나는 왜 ‘길’만 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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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제각기 다른 삶은 인간의 개성을 낳고, 그 개성은 창조력의 근원이 된다. 긴 겨울 동안에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따뜻한 봄을 기다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더운 여름에 시원한 가을을 기다린다. 말하자면 지나치며 기다리며, 시간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인간의 삶도 이러한 하루하루의 시간 속에서 영속적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러한 시간 속에서 하루의 가치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린다. 이것은 삶의 리얼리티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을 그려 온 이제까지 사실적인 형상을 그려 오면서도 싫증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매주 토요일이면 오르는 산. 준비운동 없이 걷는 발걸음에 무거움을 느끼며 숨은 조금씩 조금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차오른다. 가며, 쉬며, 보며, 생각하며, 항상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많은 사람을 본다. 그들도 나를 본다. 눈 인사하는 사람도, 그냥 무심코 지나는 사람도, 지나치며 말을 거는 사람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며 오르는 발걸음에 무게를 더한다.

하나의 봉우리에 올라서면서 조금씩 발걸음은 가벼워지고 숨은 고르게 움직인다. 동시에 빨라지는 발걸음에는 두 봉우리를 넘으며 힘이 붙는다. 항상 오르는 산길, 오르는 바위에 닿는 손끝에 힘을 줘 바위에 밀착하면서 내 몸을 가볍게 해 한걸음 한걸음 오른다. 남들은 부러움으로 쳐다보지만 난 이때만은 온 정신이 한 곳에 집중된다.

“산에 오르면 어때요, 좋아요?”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올라요. 좋고 나쁘고 없이 오르니까요. 무조건 올라요.”

누가 물으면 나는 대개 이렇게 대답한다. 산에 오르는 것은 체력과 정신력을 다듬기 위해서지만 그냥 오른다고 한다. 체력을 키우는 데는 아직 산보다 나은 것을 나는 겪지 못했다.

한 친구가 골프와 다른 육체적인 일 등으로 체력에 자신이 있다며 산에 오른 적이 있단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올랐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뒤로 처지고 힘이 무척 들더라며 등산에 필요한 것들을 한 무더기 구입한 적이 있다. 그만큼 산은 체력을 다듬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또, 험한 바위를 타는 것도 정신을 가다듬고 집중하는 데 더없이 좋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곧 그림을 그리는 데 활력소가 된다.

오만가지 잡생각을 다하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해 있는 것을 보면 음악을 틀어 놓고 있어도 나중에는 소리는 들리는데 그 노래에 관심은 없어지고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해 있다. 정신만큼은 한 곳에 몰두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산을 오른다.

언젠가 북한산 노적봉과 염초봉을 오르던 날. 일행 가운데 어느 여성 등산객이 바위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울며불며 못 내려가겠다고 떼를 쓰며 버티다 혼자 남게 됐다. 실랑이 끝에 위아래에서 챙기며 달래 마침내 자일에 의지해 내려오게 됐다. 그런데 바위 중간에서 “이것 되게 재미있는데요”하고 외쳤다. 좀더 길었으면 좋겠다며 언제 울었느냐는 듯 웃는 모습에 모두가 놀려대기도 했던 등산길.

또 한번은 30대 후반의 주부. 바위를 타는데 같이 가고 싶다고 하여 오르던 길이다. 바위 틈새에 손을 걸고 나무뿌리를 잡고 오르는 데 재미가 붙었다. 점점 더 험해져 손이 제대로 닿지 않자 뒤따르는 내게 “오빠, 궁뎅이 밀어! 빨리”하고 소리쳤다.

도움을 청하는 그 목소리에는 스스로 오르고 싶어서 오른 길인데 정말 다급한 모양이었다. 손의 힘은 달리고,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겁은 나고, 오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고, 소리치는 마음은 급하면서도 즐기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이런 일들을 매번 겪으며 우리는 오늘도 변함없이 산에 오른다.

그래서 산은 나에게 좋은 것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나는 그림을 그린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주로 나무의 절단된 다양한 단면들, 돌과 그들의 물속에 투영돼 나오는 형상, 그리고 빛에 의해 변화되는 상황들을 인간의 한 단면을 대입하여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주의적 풍경화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콘트라스트시킨 상징주의적 표상이다.

나는 나무의 단면들을 표현하면서 그 위에 길(그 길은 나무를 수직으로 절단했을 때의 단면일 수도 있고, 우리가 흔히 걷는 길일 수도 있다)을 그려 넣게 되었고, 어느 곳에선가 열매나 곡식을 추수해간 자리에 홀연히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았을 때, 마치 나의 먼 삶의 길을 보는 듯한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 길은 끝없이 먼 길일 수도 있고,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 미래의 내 삶의 길일 수도 있다. 그 길의 끝엔 두려움이 없는 빛의 무엇인가가 있을 것으로 기다려져 왔다. 그 기다림은 어떠한 희망의 ‘빛’이 될 수도 있는 기다림이다. 바로 나의 희망이었고, 회화에 있어서의 모티브였다. 막연한 것 같지만 미래에 대한 기다림은 희망이었다. 내 그림 속에 표현되고 있는, 외로워 보이거나 슬퍼보이는 촌부나 보행자들도 모두 희망을 지닌 인물들이다.

나 역시 반듯한 포장도로를 마다하고 굳이 투박한 흙길을 그리는 것은 인간의 삶도 길과 같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화면에 자욱이 퍼진 신선한 빛은 희망을 상징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희망을 찾아 길을 가는 존재라는 것을…. 그 희망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하늘과 땅과 바다, 심지어는 마음에도 길을 낸다.

그림 속에 표현된 길은 평범한 시골길이 아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시작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길이다. 그리고 역사의 수많은 미스터리를 안고 있는 푸른 공간과 인간의 삶의 영욕을 묻어두고 있는 길에 여러가지 형상들을 묘사하려고 한다.

이러한 회화적 개성은 이제까지 해왔듯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기다림은 모든 사람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좋은 마음, 좋은 기분으로 그리려고 한다.

[[이영희 /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