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님께 한 수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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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잡은 이후 에도(江戶)시대가 열렸다. 이때부터 270년간 일본은 전례 없는 평화시대를 누렸다. 12세기 사무라이들이 일본 각 지역에서 정권을 잡으면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전개했던 전국시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한시도 평화가 지속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같은 색깔의 무인정권인 에도 막부에선 이 같은 평화기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바로 ‘조선 선비의 힘’이 숨어 있었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잡혀간 조선의 선비들은 일본에 성리학을 전파했다.

에도 막부는 조선 유학자들에게 성리학을 배운 일본 지식인들을 막부의 사상 교육 책임자로 삼았다. 성리학을 막부의 정통 사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때부터 사무라이들은 무조건적으로 주군을 섬기는 것을 신하의 도리로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침략성을 주군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로 대신했다. 또한 같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하고 있는 조선에 대해서도 교린관계를 맺고 평화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조선 선비에게서 ‘한 수’ 배운 일본 사무라이들이 개과천선했다고나 할까.

책은 이 같은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의 탄생 배경에서부터 그들의 정신세계, 서로에 대한 관점까지 소상하게 추적하고 있다. 임란 후 일본에 조선의 성리학을 전파한 대표적인 이는 강항(1567∼1618)이다. 왜군이 어린 아들과 딸을 바다에 내던져 죽이는 것을 목격하면서 일본에 끌려간 강항은 여느 포로와 다른 특별대우를 받았다. 강항이 유학자임을 알게 된 일본인들이 그를 ‘모시게’ 된 것이다.

특히 일본 유학의 시조로 불리는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는 강항을 찾아와 제자로 삼아줄 것을 청했다. 그의 진지한 자세에 마음이 흔들린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사서오경을 비롯, 이황의 성리학, 조선의 과거제도와 장례제도 등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쳤다.

강항이 조선으로 귀환한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강의를 청했고, 그의 강의에 매료됐다. 머리회전이 빠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의한 성리학적 가치에 따라 일본을 통치하면 잘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에도시대 내내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항이 전하고 후지와라 세이카가 수용한 조선 성리학을 에도 막부가 관학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명한 교육자이자 외교관이었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가 서양에 일본을 소개하기 위해 영어로 쓴 ‘무사도(BUSHIDO:The Soul of Japan)’라는 책이 있다. 일본인의 윤리관을 설명한 명저로 꼽히는 이 책에서 니토베는 무사도가 요구하는 인품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무사는 주군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무사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무사는 스스로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무사는 아랫사람에게 인자하게 대해야 한다 ▲무사는 사적 욕심을 버려야 한다 ▲무사는 부귀보다 명예를 존중해야 한다 등이다. 여기에서 무사를 선비로 바꿔 놓아도 전혀 무리가 없다. 니토베가 언급한 무사도 정신은 원래 조선 선비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