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분석>‘차선의 해법’… 국내외 후유증 우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한국인 피랍사건이 무장단체 탈레반과 한국정부의 ‘석방 합의’로 해결되어 가는 분위기다. 아직 인질 석방 절차와 구체적인 조건이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이번 사건이 더이상의 인명 피해 없이 끝난다면 ‘최선의 해결’은 아니더라도 ‘차선의 해결’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인질 석방을 위해 한국 정부가 납치범들과 ‘대면 협상’한 것을 비롯, 피랍에서 석방 합의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숱한 논란거리를 남긴 것이 사실이다. 납치를 저지른 탈레반과 거기 대응해야 했던 한국 정부, 아프간과 미국 정부 등이 이번 사건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일까.

◆최대 승자는 탈레반? = AP통신은 28일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의 ‘석방 합의’ 공식 발표 내용을 전하면서 “탈레반은 한국인 인질 2명을 살해하고서 아프간의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이번 사건에서 탈레반은 아프간 정국을 좌우하는 주요 세력으로 재부상하는 등 막대한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 가장 큰 소득은 한국정부와 ‘직접 협상’을 벌임으로써 아프간 영토에서 외국 정부를 상대하는 주체가 됐다는 것. 두바이 걸프연구센터의 테러전문가 무스타파 알라니는 “한국과 직접 협상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탈레반에는 큰 이익”이라며, 이를 통해 탈레반이 아프간에서 정치적 정통성이 있는 집단이라는 인식을 퍼뜨릴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치조직이던 탈레반이 ‘납치범 집단’으로 변질됨으로써 지지기반인 아프간 남부지역에서조차 항의시위에 부딪치는 등 이미지를 떨어뜨린 것은 분명하다. 만일 몸값 챙기기 등이 추후 드러날 경우 탈레반은 이슬람 전사라는 최대 명분을 잃을 수도 있다. 라마단 금식월을 앞두고 인질 석방에 합의한 것도 이슬람권 내의 비판을 의식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은 탈레반측이 동료 석방 요구를 철회한 배경으로 “인질 억류로 탈레반 내부의 피로감이 고조돼 일부 대원들이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데다 많은 여성을 납치한 데 대해 탈레반 지지층은 물론 해외 이슬람 단체들의 반발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한국 ‘협상엔 성공, 후폭풍 우려’ =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인질사건이 숱하게 일어났지만 ‘종교단체 23명 피랍’은 규모나 성격 면에서 유례없는 것이었다. 위기를 맞은 한국 정부는 결국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이라는 모험을 했다. 문제는 이번 사건이 대테러전 협력 등 미국과의 관계나 국제무대에서의 신뢰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여러 나라가 자국민 납치를 겪었으나 분쟁국 영토 안에서 납치범들과 대면 협상을 한 것은 한국뿐이다.

간접 접촉에 의존하기엔 인질 수가 워낙 많았다는 점이 감안될 수도 있겠지만 ‘범죄집단과 타협했다’는 시선을 완전히 씻어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 아프간, 레바논 등 이슬람권 곳곳에 군대를 파병한 한국 정부가 자국민의 위험지역 선교 방문을 자제시키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됐다. 분쟁지역에서 한국인 납치가 더 빈발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당혹스러운 아프간과 미국 = 9월 중순 라마단(이슬람 금식월) 사면설 등 ‘물밑 합의’ 소문은 무성하지만, 일단 탈레반은 가장 민감한 이슈였던 ‘인질 - 수감자 맞교환’ 요구를 철회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프간 정부는 지난 3월 이탈리아 인질과 탈레반 수감자 교환 뒤 “더이상 인질교환은 없다”고 공언했고 이번에도 어쨌든 명분을 지켰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직접 협상에 나서 탈레반에 역설적으로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아프간 정부는 난감한 처지가 됐다. 아민 파랑 무역산업장관은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측 협상을 ‘조건부 항복’이라 표현하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모든 나라가 이런 식으로 조건부 항복을 한다면 탈레반의 요구를 들어주는 셈이 된다”며 “다른 나라들이 한국의 전례를 따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직접 협상’에 역시 당혹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톰 케이시 국무부 대변인은 28일 “인질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도 테러범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정책을 재차 강조했다. AP는 인질 석방 합의소식이 다국적군과 탈레반의 유혈 교전이 최악에 달했던 이날 발표됐다는 점을 들면서 “한국 정부와 무장조직의 대면 접촉은 미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구정은기자 koj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