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담덕’의 리더십

위험한 작전을 앞두고 젊은 왕을 호위하는 노장군이 말한다. “설마 직접 가시려 하십니까. 폐하의 병사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젊은 왕은 “주위에 듣는 사람 없지요”하더니 이렇게 되받는다. “내 병사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거예요, 모든 장군, 병사들이 수많은 정보와 충고를 주지만, 결국은 내가 결정하는 거잖아요. 그 때마다 겁나는 거 알아요.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거라면, 내가 틀렸다면, 내가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거라면…내가 다 죽일 수도 있어요.”

노장군이 놀라 왕의 말을 막는다. “제 나이 15살 때부터 전쟁터를 누볐습니다. 진격의 나팔소리에 누구 보다 먼저 달려 나갔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죽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폐하의 뒤를 따르면서 처음으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저 밖에 있는 병사들 다 같은 생각일 겁니다. 이 분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그러니 계속 우리 옆에 있어주시면 됩니다.”

역사의 한 토막이 아니라, 인기 TV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온 최근 장면이다. 그 순간, ‘저런 지도자가 있다면’하는 생각이 든 것은 30%를 넘는 시청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잠시 “대통령 선거를 취재한다는 정치부 기자가 드라마 속 허구에 마음을 뺏기느냐”는 어쭙잖은 자탄도 했다. 하지만 작가 송지나씨가 그린 젊은 광개토왕, 담덕의 리더십은 분명히 새로운 트렌드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한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게 왕인데, 드라마 속의 담덕은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희생당할지 모르는 한 목숨에 번민한다. “목숨을 버리고 싸우는 놈은 필요 없다. 어떻게든 살아서 끝까지 내 옆에 있어. 그것이 나, 너희의 왕의 명령이다”고 한다.

권력의 최정점, 집단의 대표 인격, 말이 곧 법인 절대자는 이 드라마에 없다. 강요보다는 설득, 일방이 아니라 쌍방, 집단성보다는 개성,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 리더십의 덕목으로 보여주려 한다. 물론 이른바 ‘부드러운 카리스마’라는게 어의모순적이고, 대중들은 배용준이라는 ‘완소남’(완전 소중한 남자)에 덧입힌 이미지를 소비할 뿐이라는 비평가들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사실과 허구가 결합된 ‘팩션(faction)’에서 대중들이 소비하는 이미지 속에 숨은 메시지를 찾는 게 아주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TV 드라마를 보면 이 시대가 원하는 지도자의 자질을 알겠는데, 현실 속의 ‘대선 드라마’에선 도무지 감흥이 일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회창 전 총재의 무소속 출마선언 이후 정치 평론가 사이에선 정치 분석 무용론이 일었다. 그나마 싹을 보이던 정책·노선 경쟁의 싹이 얼어붙어버렸고, 정당정치의 규범적인 토대에서 정치를 논평할 근거가 사라졌다. 기준을 잃어버렸는데, 분석이란 게 가당하겠는가. 모든 판단의 근거는 인기가요 순위를 바라보듯 따져보는 여론조사 지지율뿐이다. 더구나 김경준씨 송환으로 시작된 ‘BBK정국’이 후보들의 경쟁 마당을 독차지하고 있다. 정치가 고유의 영역 안에서 지도자의 평가 기준을 만들어내고, 리더십을 형성해가는 과정이 불과 한달 사이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향후 5년의 리더십을 결정짓는 대선이 희망걸기 경쟁이 아니라, 절망 줄이기 경쟁이 돼버린 셈이다. 시중에는 “어서 대선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말들이 나돈다고 한다. 이번 대선 드라마의 시청률이 형편없다는 얘기다. 그게 역사의 걸출한 왕들이 등장하는 사극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꼴 보기 싫은 현실을 가려주는 팬터지가 안방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내일 대선 후보등록이 시작된다. TV드라마를 기다리듯 ‘들뜬 마음’으로 선거날을 기다리는 건 영 틀려버린 것일까.

[[오승훈 정치부차장]] oshu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