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속 그 설경… 재 넘을 때마다 “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정선에서 424번 지방도로를 따라 화암 방면으로 향하면 길옆으로 주르륵 펼쳐지는 화암팔경을 만난다. 소금강, 용마소, 광대곡…. 하나같이 절경이다. 태백의 산간마을에는 눈발이 분분히 흩날리는 날이었지만 이곳엔 겨울비가 뿌렸다. 눈이 내리면 이 길에는 환상적인 설경이 펼쳐진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깎아지른 암벽 끝에 아찔하게 고사목이 서 있는 몰운대. 이 벼랑에 서면 비장감이 느껴진다. ‘몰운(沒雲)’이란 ‘안개에 잠긴다’는 뜻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백전리의 150년 된 물레방아에 흰 눈이 내려 쌓였다. 처마 밑에는 누가 널어놓았는지 무시래기가 겨울바람에 말라가고 있었다.

# 424번 지방도로 첫 번째 구간
…한겨울에 몰운대를 찾아가는 까닭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설경을 따라가는 길로 첫손에 꼽을 만한 곳이 바로 강원 정선군 동면 화암리에서 태백시 하장면으로 이어지는 ‘424번 지방도로’다. 정선에서 59번 국도를 타고 남면 방향으로 내려가다 만나는 덕우삼거리. 여기서 ‘눈(雪) 나라로 가는 길’인 424번 지방도가 시작된다. 동강의 최상류인 동대천의 물길을 따라가는 이곳에서는 눈이 아니어도 곳곳에 눈을 붙잡는 절경이 펼쳐진다.

그 길의 초입에는 ‘화암 8경’이 있다. 이 길에서는 1경 화암약수부터 8경 광대곡까지 주르륵 명승이 펼쳐진다. 2경 거북바위와 3경 용마소, 5경 화표주, 6경 설암(소금강)은 도로변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들. 4경 화암동굴이나 8경 광대곡은 다른 계절이라면 모를까 지금 같은 겨울에는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몰운대만큼은 눈 내리는 겨울에 만나는 풍경이 진짜다. 까마득히 솟은 벼랑인 몰운대 끝에 아슬아슬 몸을 뒤튼 고사목의 비장감은 겨울이 제격이다. 몰운대는 왜 겨울에 찾아가야 할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박정대 시인의 시 ‘몰운대에 눈 내릴 때’에 있다.

“세상의 끝을 보려고 몰운대에 갔었네 /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사랑보다 더 깊은 / 눈이 내리고, 눈이 내리고 있었네 / 강물에 투신하는 건 차마 아득한 눈발뿐 / …(중략)… / 불현듯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그리운 이름들 / 바람이 달려가며 호명하고 있었네 / …(후략)”

그 길로 접어들었을 때는 촉촉하게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고, 시인이 ‘세상의 끝’이라고 했던 몰운대에서는 비장미가 물씬 느껴졌다. 몰운대 벼랑 끝에 섰을 때 펑펑 눈이라도 쏟아져 시에서처럼 ‘아득한 눈발이 강물로 투신’한다면 그 비장미는 한결 더 짙어질 터였다.

# 424번 지방도로 두 번째 구간
…그 길에서 순백의 절경을 만나다

몰운대를 지나 오두재를 넘어가는 길에는 앞도, 뒤도, 옆도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어찌나 산이 깊은지 해발 1000m를 훌쩍 넘는 봉우리마저도 이름조차 갖지 않은 것들이 즐비하다. 동해에서 습기를 품고 온 북동기류가 이런 높은 산들에 가로막혀 눈을 뿌린다. 워낙 고지대라 기온이 낮다 보니 다른 곳에 비가 내려도 이곳에서는 거짓말처럼 눈이 내린다. 한번 내린 눈도 쉬 녹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내리던 비는 진눈깨비로 바뀌었다가 역둔을 지나면서부터 폭설로 바뀌었다. 길옆의 낙엽송에는 하얗게 눈꽃이 피어났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전나무 가지는 척척 늘어졌다. 화려한 설경만으로도 황홀할 지경인데, 산 계곡마다 피어난 흰 구름이 이 산 저 산으로 옮겨 다니면서 동양화까지 그려낸다. 이럴 때는 도리 없다. 차를 길가 한쪽에 세우고 산자락에 눈 내리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다볼밖에….

사르륵사르륵 내리는 눈은 너른 고랭지 채소밭을 덮고, 산간마을의 슬레이트 지붕을 덮고, 하장초등학교 역둔분교의 운동장을 덮는다. 전교생이라고 해야 14명인 역둔분교 운동장 한쪽에는 이른 아침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과 함께 만들었을 눈사람이 저 혼자 오도카니 교정을 지키고 서 있다.

# 424번 지방도로 세 번째 구간
…댓재를 넘어서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다

역둔을 지나 길은 오두재를 넘어간다. 오두재 주변 설경의 백미는 낙엽송 군락에 덮인 눈이다. 이쪽의 산자락에는 거대한 군락의 낙엽송 숲이 펼쳐져 있다. 낙엽송에 얹힌 눈은 섬세한 수공예 보석을 보는 듯하다. 실핏줄처럼 펼쳐진 가지마다 흰 눈이 쌓인 모습이 화려하다. 낙엽송이야 흔하디 흔한 나무지만, 다른 곳에서 낙엽송의 눈꽃을 보기란 쉽지 않다. 가는 가지에 쌓인 눈이 금세 녹아버리는 탓에 눈 내린 직후에나 짧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두재 부근은 기온이 낮은 데다 낙엽송들이 워낙 촘촘히 붙어 자라기 때문인지 활짝 핀 눈꽃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눈이 그치고 이튿날에 다시 찾아갔던 오두재 자락에서도 낙엽송 눈꽃들은 여전히 반짝거렸다.

오두재를 넘어온 424번 지방도는 임계와 태백을 잇는 35번 국도와 만나 함께 이어지다가 삼척으로 넘어가는 댓재를 타고 오른다. 태백시 하장면에서 삼척시 미로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눈이 내리지 않더라도 이쪽 길의 풍광은 빼어나다. 댓재 정상에서 구불구불 돌아 동해바다 쪽으로 내려서는 산자락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는데, 구름이라도 걸릴라치면 말 그대로 ‘선경(仙景)’이 펼쳐진다. 구름 사이로 저 아래 구불구불 오십천이 흘러가고 그 너머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 길에서는 산촌의 집들이 정겹다. 눈 쌓인 낮은 처마 밑에는 잘 말린 장작들이 쌓여 있고, 굴뚝에서는 푸른 연기가 피어오른다. 눈 내린 풍경이 이렇듯 포근하고 따스하다.

#412번 지방도로
…노나무재 넘어 옛 탄광마을로 향하는 길

424번 도로 역둔삼거리에서 하장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고, 412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백전리를 지나 사북 쪽으로 가는 길의 설경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 길은 비교적 평탄한 편이라 눈이 웬만큼 내려 쌓인다 해도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 제법 높은 노나무재가 길을 가로막지만, 산허리에 터널이 뚫려 비교적 평탄하게 사북까지 가닿을 수 있다. 이 길을 가자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백전리의 물레방아다. 초가지붕을 이고 선 물레방앗간에 놓인 물레방아는 국내에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 석탄을 캐내기 훨씬 이전인 첩첩산중의 산골마을에서 산판을 일궜던 화전민들이 150여년 전에 지은 것이다. 겨울철에는 쓸 일이 없어 세워두고 있지만, 막아둔 물길만 트면 지금도 물레방아는 덜컹거리며 돈다.

잣나무들이 유독 많은 백전리의 설경은 다른 곳과는 또 다르다. 잣나무의 풍성한 가지에 눈이 쌓인 풍경은 마치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생크림을 얹은 듯한 모습이다. 나뭇가지 위로는 눈이 쌓여 흰빛으로 빛나고 눈 그늘 밑의 나무 밑동은 짙은 어둠이다. 노나무재를 넘어서면 길은 옛 탄광마을인 사북으로 이어진다. 지금이야 하이원리조트가 들어서면서 ‘상전벽해’가 된 곳이지만, 그래도 사북으로 향하는 길옆 산자락에 깃들여 사는 주민들의 시간은 몇십년 전의 풍경 그대로 타임머신처럼 멈춰 서 있다.

정선·태백·삼척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