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길 따라 4.8㎞… 초록 숲에 빠지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미천골 계곡에는 실핏줄처럼 수많은 지류가 합류하는데, 물소리를 거슬러 조금만 올라가도 폭포가 비밀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지류를 따라 오르다 만난, 돌단풍과 초록이끼로 가득한 폭포. 그러나 미천골에서는 이런 정도의 폭포에는 이름도 붙여주지 않는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불바라기약수 인근의 황룡폭포.

초록의 기운으로 가득한 초여름의 숲을 걷습니다. 우람하게 치솟은 전나무와 금강송, 들꽃과 야생의 열매들이 가득한 원시림의 숲길입니다. 숲이 거느린 짙은 계곡 안쪽에는 촉촉한 이끼 사이로 수정처럼 맑은 물이 쏟아지는 서늘한 폭포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 길을 걷노라면 온몸에 차갑고 맑은 초록빛이 천천히 차올라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귓속에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습니다.

설악산 국립공원과 오대산 국립공원의 딱 중간쯤. 이곳은 강원 양양군 서면 황이리의 미천골입니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에서 구룡령 고갯길을 넘고 양양 땅에 접어들어 설악과 오대를 잇는 응복산(1360m) 북쪽 자락의 원시림을 파고들어 오르는 계곡입니다. 1000년 더 지난 세월 저편에서 당대의 수도승이 모이던 도량이었다는 선림원지를 지나고, 자연휴양림을 관통해 차단기를 넘어 불바라기약수까지 가닿는 길입니다.

미천골은 길고 긴 비포장 흙길의 임도(林道)를 그대로 둔 채 산막과 통나무집을 앉혀 놓아 휴양림의 자연미만으로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휴양림을 꾸미면서 야영장과 산막을 들이고, 곳곳에 편의시설을 설치했음에도 자연을 흐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호젓한 휴양림을 걷는 발걸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절로 박자를 맞추고, 계곡의 물가에서 물방울을 튀기는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계곡의 청아한 물소리와 섞여 흘러갑니다. 그곳에서는 어느 것 하나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고, 어긋나지 않습니다.

미천골 숲길의 진면목은 그러나, 휴양림이 다 끝나고 길을 막는 차단기를 넘어가야 비로소 만나게 된답니다. 휴양림의 끝에서 불바라기약수까지 이어지는 편도 4.8㎞의 비포장 임도입니다. 사람이 놓은 길이지만, 그 길은 인적이 드문 대신 다람쥐와 새들, 잉잉거리는 꿀벌과 나비들의 세상입니다. 유순한 데다가 잘 다져져서 오래 걸어도 숨이 차지 않는 길. 걸으면 걸을수록 싱싱한 수목의 기운을 받아 오히려 펄펄 기운이 나는 길입니다.

길은 제법 길지만 그 길을 걷는 동안에는 잠깐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어둑한 숲터널에서 진한 숲향기를 맡다가, 길가의 조팝나무 꽃에 한눈을 팔다가, 건너편 산자락의 금강송 중 가장 우람한 놈을 찾아보다가, 아무도 가닿지 않았을 까마득한 발아래 계곡을 굽이쳐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이윽고 목적지에 당도하는 그런 길입니다.

불바라기약수는 서늘하고 촉촉한 습기로 가득한 비밀스러운 그 길 끝에 있습니다. 청룡과 황룡이란 이름의 두 개의 폭포는 마음 속의 때를 죄다 빗질하려는 듯 ‘쏴아’ 흘러내립니다. 폭포의 암벽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는 쇳내를 가진 탄산수로 한모금만 머금어도 정신이 번쩍 납니다. 불바라기약수를 지나면 길은 더 깊어지면서 응복산과 조봉의 산자락을 휘감고 무려 50㎞가 넘게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돌아나와도 좋겠습니다. 왕복 4시간쯤의 걷기만으로도 진초록 기운이 온몸 가득 충전돼 있을 테니까요.

양양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