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은 ‘꽃 폭죽’ 피우고 옛집은 ‘길손’ 붙잡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대덕산 부엉이바위에서 내려다본 영광 법성포구의 모습. 바다로 이어지는 물길이 벼가 익어가는 들판을 둥글게 감싸안고 있다. 오른쪽 끝이 법성포다. 짧은 등산로로 20분쯤이면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불갑사 불전의 처마와 처마가 잇닿은 모습. 인도승려 마라난타가 백제 때 처음 불교를 전하러 와서 지었다는 불갑사에는 내력만큼이나 깃든 이야기도 많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연안 김씨 종택 2층 구조의 삼효문은 비바람에 의한 훼손을 막기 위해 새시를 설치해놓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법성포 뒷골목의 기꾸야여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여관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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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무릇이 화려하게 불 붙은 절집…불갑사

꽃의 목적이 나비를 유혹하는 데 있다면, 선홍색 꽃무릇이야말로 화려한 치장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가장 유혹적인 꽃이다. 숲 그늘 아래 가을볕이 눈부시게 드는 곳에 피어난 꽃무릇은 마치 암전한 무대 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선 한껏 치장한 전성기의 여배우 같은 느낌이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명품 드레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그런 꽃이다.

전남 영광의 불갑사. 이 땅에 불교를 전한 인도의 스님 마라난타가 바다를 건너와 처음 지었다고도 하고,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도 전하는 절집. 그 절집으로 드는 길에는 꽃무릇이 화려하다. 절집은 중창불사가 한창이어서 소란스럽고 절집으로 드는 길도 잘 조경된 서양식 공원처럼 단장돼 있어 운치는 떨어지지만, 군데군데 숲그늘에 피어난 꽃무릇의 낭자한 선홍빛으로 그득하다.

불갑사에서 눈여겨볼 것은 천왕문. 주먹코의 사천왕상이 눈을 부라리며 절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본디 불갑사의 사천왕은 전북 흥덕의 연기사를 지키던 것이었으나 절집이 폐사돼 비바람을 맞고 있었다. 당시 설두대사의 꿈에 사천왕이 나타나 “나를 옮겨주면 가람과 절의 재산을 지켜주겠노라”고 했단다. 마침 영광군수도 똑같은 꿈을 꾸면서 법성포 뱃길을 따라 130년 전쯤에 사천왕을 들여왔다. 그 뒤에 6·25전쟁 때 빨치산이 만세루에 불을 질렀으나 이내 꺼져버렸다니 사천왕이 ‘꿈 속의 약속’을 지킨 셈이 됐다.

불갑사 대웅전에서는 화려한 꽃문살도 눈길을 붙잡고, 대웅전 안으로 들면 대들보 기둥을 타고 내려온 용이 쥐를 쫒는 형상이 이채롭다. 절집을 짓던 목수가 절대로 부정한 여자를 들이지 말라고 했으나, 밥 나르던 여인이 문틈으로 들여다보자 목수가 피를 토하고 죽고 그가 토한 피가 까치가 돼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을 뒷받침해주듯 불상 뒤편 벽에 까치그림 두 폭이 남겨져 있다.

# 꽃무릇의 또 다른 모습…용천사와 선운사

불갑사에 앞서 일찌감치 꽃무릇으로 알려진 절집이 바로 전남 함평의 용천사다. 불갑사와 용천사는 불갑산(516m)과 모악산(348m)이 자연스럽게 능선으로 붙어있는 산자락에 깃들어 있다. 두 절집 사이의 거리는 하나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가로질러 가면 불과 4㎞ 안팎. 찻길로 둘러서 가도 차로 3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다.

이쪽이건 저쪽이건 꽃이야 똑같지만, 공원처럼 가꿔진 불갑사에 비해 용천사의 꽃무릇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주차장에서 절집으로 드는 양지바른 길에는 나무로 짠 지붕을 얹은 조형적인 야트막한 돌담 안팎으로 꽃무릇이 활짝 피어 있다. 용천사 절집의 허리춤으로 난 길을 따라가는 어둑한 숲속 산책로는 아직 꽃은 피지 않았으되 온통 꽃무릇의 연초록 꽃대가 빗살처럼 올라와 있다. 이번 주말쯤이면 꽃대 끝의 붉은 기운이 도는 꽃봉오리에서 일제히 폭죽처럼 꽃무릇이 피어나리라.

꽃무릇으로 이름난 또 하나의 절집이 전북 고창의 선운사다. 사실 선운사는 꽃무릇 말고도 늦봄에는 동백이, 가을에는 단풍이 절집 주변을 물들이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선운사에는 유독 ‘붉은 것’들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피고 또 진다. 꽃무릇도, 동백도, 단풍도 다 선홍빛이니 말이다. 선운사의 꽃무릇은 아직 좀 이른 편이다. 절집 앞으로 흘러내리는 맑디 맑은 도솔천을 따라 이제 막 하나둘 꽃무릇이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했다.

선운사의 꽃무릇이 유독 눈길을 잡는 것은 물길을 따라 꽃을 피워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햇살이 막 번지기 시작할 때 옅은 안갯속에서 꽃무릇의 붉은빛이 도솔천의 물을 발갛게 물들이는 장면은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아름답다.

# 멀리서, 또 세월을 거슬러 법성포를 바라보는 법

꽃무릇을 둘러보러 나섰다면 그 여행의 중심지는 전남 영광이다. 영광이라면 다들 ‘굴비의 고장’으로만 기억하지만, 영광에는 명소들이 곳곳에 있다. 하나하나 짚다 보면 숨이 다 가쁠 정도다. 먼저 가겟집마다 엮은 굴비두름을 내걸어 짭쪼름한 바다 내음으로 가득한 법성포구. 사실 법성포는 굴비를 파는 가게들로 가득 차버린데다 포구 앞에 인공섬을 조성하고 관광시설을 들이는 공사가 한창이어서 가까이서는 포구의 운치를 느낄 수 없다.

법성포를 제대로 보겠다면 포구 뒤쪽의 대덕산에 올라야 한다. 말이 산이지 등산로에서 20분만 오르면 정상의 부엉이바위에 닿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둥글게 휘어진 물길과 함께 법성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황금빛으로 물든 논을 둥글게 휘감아 흘러내리는 물길과 그 물길이 닿는 바다 그리고 택리지에 씌어진대로 ‘빗살처럼 집들이 촘촘한’ 법성포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법성포에서 홍농으로 넘어가는 산허리에 ‘숲쟁이’가 있다. ‘쟁이’란 언덕을 뜻하는 말이니 풀어보자면 ‘숲언덕’쯤 되겠다. 120여그루가 넘는 우람한 느티나무와 팽나무, 개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방풍림이다. 사실 숲쟁이를 ‘눈’으로 보자면 별것 없다. 대신 이곳은 ‘마음’으로 옛 풍경을 떠올려야 하는 곳이다.

조선시대부터 매년 단오제가 열렸다는 숲쟁이에 들어 그날의 풍경 몇 장을 떠올려보자. 법성포에 조기 파시가 열리면서 몰려든 객지의 상인들이 북적이고, 칠산바다에는 조기잡이 배들의 불빛이 꽃처럼 빛난다. 때마침 전남 일대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싣고 서울로 떠났던 조운선이 갖가지 상품을 싣고 회항한다. 그때가 바로 음력 5월5일 단오 무렵이다. 단옷날이면 법성포의 파시에 운집한 인파들과 조기잡이를 나갔던 뱃사람들 그리고 법성포 주민들은 숲쟁이에서 모여 단오제를 펼쳤다.

영광의 명소를 더 보태보자. ‘최고의 낭만적인 해안도로’라는 백수해안도로는 낙조 무렵에 목적지 없이 그저 그 길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길이고, 염포의 드넓은 염전의 풍경도 놓치기 아쉽겠다.

# 영광에서 둘러보는 3채의 집구경

영광의 이름난 관광지야 관광안내지도 한 장이면 다 찾아가볼 수 있는 곳. 그러나 숨겨진 곳들도 있다. 영광을 찾아간다면 관광안내도에 나오지 않는 세 채의 집 구경을 권한다. 첫번째는 법성포의 ‘기꾸야(菊家)’ 여관이다. 법성포 해안 뒷골목의 가겟집 ‘원굴비’ 옆 골목으로 들면 건물들 사이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여관건물이 있다. 여관건물은 당시의 구조를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특히 2층 다다미방에 들면 마치 일본의 전통 료칸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건물에서는 일본 특유의 정서와 여유가 느껴지는데 특히 다다미방의 문틀에 나무를 도려내서 대나무와 참새를 그려낸 솜씨는 일품이다. 이 집에 살고 있는 송희득(85)씨는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 사람은 여관 근처에 얼씬도 못했다고 들었다”며 “일본 사람들이 몹쓸 짓을 했지만, 지금 뜯어봐도 집 짓는 것 하나는 정말 철두철미하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군남면 동간리의 연안 김씨 종가는 고종때 지어진 고택으로 바깥 대문채부터가 범상치 않다. 네귀에 높은 기둥을 올리고 위쪽에 ‘삼효문’을 올려 독특한 형태의 2층 문을 만들어놓았다. 삼효문은 연안 김씨의 6대손과 11대손, 12대손의 효성이 지극해 내려진 것이다. 조선왕조의 기운이 기울면서 지방의 토호세력들이 기승을 부리던 때 지어진 것이라, 궁궐이 아니고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용 문양을 삼효문에 새기기도 했고, 안채에는 왕가에서나 허락되던 5계단을 놓았다. 이즈음 서당채 옆의 연못에는 부레옥잠이 화들짝 꽃을 피우고 있다.

영광읍 입석리의 영월 신씨 종가는 집보다는 오랫동안 이어온 정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종가는 무려 500여년 동안이나 불씨를 이어왔다. 종가를 지키는 종손 신호준(77)씨의 19대조가 둘째 아들에게 불씨가 담긴 화로를 전해주며 “항상 불을 중히 간직하라”고 당부했고, 자손들이 이 당부를 500년 동안 지켜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전쟁을 거치면서 오뉴월 삼복에도 맏며느리에게 이어오면서 한번도 꺼지지 않았던 불씨는 1990년 “이제 그만 끄라”는 종손의 결단으로 꺼지고 말았다. 되돌아보면 아쉬움이 더하지만, 고택에서 그 불을 지켜오던 쇠화로를 구경할 수 있다.

영광·함평·고창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가는 길 & 묵을 곳 & 먹을 것

꽃무릇 보러가는 길 = 선운사나 불갑사, 용천사 모두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선운사 나들목으로 나가면 곧바로 선운사 방면 안내판이 나온다.

선운사에서 불갑사로 가려면 다시 서해안고속도로로 되돌아나와도 되지만, 그보다는 아산면, 무장면을 지나는 734번 지방도로와 23번 국도를 갈아타고 가는 편이 낫다.

무장면 쪽에서는 메밀꽃이 한창 흐드러진 학원농장이 가깝다. 곧바로 불갑사로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영광나들목으로 나와서 영광읍내를 지나 23번 국도를 타고 가면 된다. 불갑사 방향 이정표가 잘 돼 있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영광에는 가족여행객을 위한 숙소가 드물다. 영광읍내에 있는 모텔을 이용하는 게 최선이다. 읍내의 시카고모텔(061-351-7300)이나 카리브모텔(061-353-1400) 등이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이라 시설이 깔끔한 편이다. 3만~4만원.

영광에는 맛집들이 즐비해 입이 즐겁다. 굴비정식을 내오는 일번지식당(061-356-2268)이 외지인들에게는 가장 알려져 있는 곳. 그러나 이곳 말고도 저렴한 가격에 맛깔스러운 음식을 내오는 곳들이 많다.

스물네가지 반찬을 내오는 보리비빔밥으로 유명한 불갑사 입구의 할매집(061-352-7844)은 지역 주민들도 식사시간이면 줄을 서는 곳.

녹차 얼음물에 밥을 말아 짭쪼름한 마른굴비를 반찬으로 내놓는 해촌식당(061-353-8897)에서는 밥에 물을 말아 쪽쪽 찢어가며 먹던 옛 마른 굴비 맛을 느낄 수 있다. 만나식당(061-356-2377)은 칼칼하면서 단맛이 도는 조기찌개를 자작하게 끓여내는 맛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