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대통령 전용기 추락…97명 전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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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부부가 10일(현지시간) 러시아 방문 중 전용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면서 전 세계가 큰 충격에 빠졌다.

폴란드 정부는 전 국민 애도주간을 선포하고 11일 정오에 묵념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으며, 긴급 각의를 소집해 조기 대선 실시를 비롯한 향후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대통령 권한은 헌법에 따라 보르니슬라브 코모로브스키 하원의장이 대행하게 된다. 사고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조종사가 시계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다 추락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등 각 국 정상들도 잇따라 애도성명을 발표했다.

◈ 탑승자 97명 전원 사망…‘카틴 숲 학살사건’ 추모행사 참석차 러시아 방문

레흐 카친스키(60) 대통령과 부인 마리아 카친스키 여사를 비롯한 폴란드 공식 대표단 88명을 포함해 모두 97명이 탑승한 러시아제 투폴레프(Tupolev-154) 비행기가 10일 오전 10시56분쯤(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350km 떨어진 스몰렌스크 공항 부근에 추락했다.

이 사고로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와 슬로보미르 스크르치펙(47) 폴란드 중앙은행 총재, 알렉산더 스츠지글로 국가보안국장 등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현재 사고 현장에서는 긴급 출동한 구조대원들이 시신 수습과 기체 잔해 정리 작업을 진행 중이며, 경찰은 취재진과 일반인들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카친스키 대통령은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의 공식 초청을 받은 않은 가운데 ‘카틴(Katyn) 숲 학살 사건’ 추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스몰렌스크로 가던 중이었다.

‘카틴 숲 학살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당시 소련 비밀경찰(NKVD)이 서부 스몰렌스크 인근의 산림 지역인 카틴 숲에서 폴란드인 2만2천여 명을 살해한 뒤 암매장한 사건이다.

당시 소련은 폴란드인 학살이 나치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지만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지금까지도 폴란드와 러시아 간 갈등의 불씨로 남아있다.

푸틴 러시아 총리는 이번 70주년 추모식에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를 처음으로 초청해 양국 간 화해를 시도했지만 그동안 러시아 정부를 강력히 비판해온 카친스키 대통령은 공식 초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카친스키 대통령은 “폴란드의 최고 대표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초대가 없더라도 카틴을 방문할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이날 카틴에서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별도로 추모식을 개최할 예정이었다.

폴란드 자유노조 지도자였던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은 AFP 통신에 “상상할 수도 없는 참사이자 비극”이라면서 “소련은 70년전 카틴에서 폴란드 사람들을 대량학살했고, 오늘은 폴란드 엘리트들이 그곳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을 애도하려 가다 목숨을 잃었다”고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 테러는 아닌 듯…조종사 실수 가능성 제기

러시아 관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은 스몰렌스크 현지 관리의 말을 인용해 이날 추락사고의 원인은 착륙을 시도하던 조종사의 실수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검찰과 항공 당국에 따르면 비행기는 공항 주변에 짙은 안개가 낀 상태에서 착륙을 시도했고 활주로에서 300여m 떨어진 숲 속 나뭇가지 끝에 기체가 부딪힌 후 추락해 화재가 발생했다.

특히 러시아 당국은 사고기 조종사가 벨라루스 민스크로 회항하라는 관제탑의 지시를 무시하고 4번이나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했다고 전했다.

항공 사고 전문가들은 시계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다 기체가 나뭇가지에 걸리자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면서 추락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노후한 비행기의 기체 결함에 따른 사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AP통신은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가 탑승한 러시아제 Tu-154기는 최소 20년 이상 사용된 기종으로 폴란드 당국도 기종 교체를 검토했지만 예산 문제때문에 현 기종을 계속 사용해 왔다고 전했다.

1968년 10월에 첫 취항한 Tu-154기는 길이 47.9ｍ에 폭 37.5ｍ(좌우 날개 포함)의 승객 156~180명을 태울 수 있는 중형 항공기다.

항공사고 정보 사이트인 ‘항공안전네트워크’에 따르면 지금까지 Tu-154와 관련된 사고는 모두 66건으로, 이 가운데 6건이 최근 5년간 발생했으며 1994년부터 지금까지 100명 안팎이 사망한 대형 사고만 16건에 달한다.

한편 러시아 검찰 관계자는 “회수된 블랙박스에 대한 분석 작업이 끝나야 정확한 사고 원인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고의 조사는 유리 차이카 러시아 연방 검찰총장이 직접 수사를 지휘하고 있으며, 폴란드 수사관과 항공 사고 전문가들도 조사에 참여할 예정이다.

◈ 각 국 애도성명 잇따라...

폴란드 전후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이번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폴란드 대통령궁에는 조기가 게양된 가운데 많은 시민들이 조화와 촛불을 들고 찾아와 사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각 국 정상들의 애도성명도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 앞으로 보낸 조전에서 “오늘 폴란드 대통령 특별기가 추락해 항공기에 탑승했던 카친스키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금할 수 없다”면서 “한국 정부와 국민을 대표해 폴란드 국민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지난 2008년 한.폴란드 수교 20주년을 맞아 국빈 방한한 카친스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지난해에는 폴란드를 공식 방문한 바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투스크 폴란드 총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부부 등이 사망한 데 대해 조의를 표하면서 “폴란드는 물론 미국과 세계에 엄청나게 충격적인 손실”이라고 애도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폴란드 정부에 조문을 보내 “카친스키 대통령은 오랫동안 국민들을 위해 봉직해왔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고, 지난달 폴란드를 방문했던 찰스 왕세자도 별도의 성명을 통해 “몇 주전 큰 환대를 받고 돌아왔는데 갑작스런 소식에 매우 당황했다”면서 폴란드 국민들을 위로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도 애도 성명을 발표한 뒤 푸틴 총리를 사고 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세르게이 쇼이구 비상대책부 장관을 현지로 급파했다.

◈ 카친스키는 누구인가…폴란드, 조기 대선 실시키로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은 1980년대 자유노조 운동으로 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끈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정치에 입문한 뒤 보안장관과 법무장관, 바르샤바 시장 등을 거쳐 지난 2005년 10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특히 카친스키는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의 미사일방어(MD) 기지를 자국 내에 건설하는 데 동의해 러시아의 반감을 사기도 했지만 폴란드 국민들로부터는 큰 지지와 존경을 받아온 인물이다.

한편 폴란드의 대통령 권한은 헌법에 따라 보르니슬라브 코모로브스키 하원의장이 대행하게 된다.

폴란드 헌법에 따르면 하원의장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는 날로부터 14일 이내에 선거 일정을 공고해야 하며, 선거일은 공고일부터 60일 이내로 정해야 한다.

<노컷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