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 관료들이 日帝 책임 희석시켜”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 100년을 하루 앞둔 지난 28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사연구회 주최 국제학술회의.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조선통치 방식은 너무 친절해서 그들(조선인)에게 성가신 인상을 준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어를 써서는 안 된다. 일본어를 사용하라. 메이지(明治) 신궁, 이세(伊勢) 신궁에 참배하라 하기도 하고, 백의(白衣)를 입지 말라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선의(善意)’입니다만, 그들이 보면 참을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미즈타 나오마사(水田直昌) 전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이 1980년 펴낸 회고록에서 밝힌 일제의 동화정책을 긍정하는 태도를 통해, 패전 후 35년이 지났지만 ‘식민지 근대화론’과 ‘시혜론’, ‘선정론’에 바탕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조선통치 인식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형식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지난 28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식민, 피식민, 탈식민의 정신사’를 주제로 열린 한국사연구회(회장 최광식) 주최 국제학술회의에서 “미즈타 등과 같이 패전 후 귀환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식민지 지배 경험이 전후 일본사회의 식민지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일본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과 반성을 희석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이날 이 연구원이 발표한 ‘패전 후 귀환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식민지 지배 경험과 그 영향’은 전후 일본사회에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안팎의 조선통치 비판에 직면하면서 자신들의 식민지 경험을 정리하는 과정을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조사’ 편찬에 참여했던 미즈타와 한일교섭에 관여했던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중앙일한협회장, 우방협회 등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 중앙일한협회는 1926년 조선총독부의 후원단체로 출발했던 중앙조선협회가 1947년 동화협회로 이름을 바꿨다가 1952년 다시 명칭을 변경한 것이며 우방협회는 조선통치에 관한 자료를 수집·연구·보급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중앙일한협회의 자매단체다.

특히 우방협회가 펴낸 우방문고 자료 중 1958년부터 62년까지 다나카 등 식민지 관료 출신과 당시 와세다(早稻田)대 대학원생이었던 재일동포 강덕상씨와 미야타 세쓰코(宮田節子) 등 젊은 연구자들이 참여해 질의응답을 녹취한 기록은 의미가 적지 않다.

한국사연구회의 이날 학술대회는 식민지를 경험한 많은 나라들이 정치·경제·문화 영역에서 여전히 식민주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규명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사실 일제의 식민사관과 민족성론, 정치관료의 폭력성과 무책임 구조 등은 식민지배를 통해 우리에게 이식돼 오늘날까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령 조선(한국)식산은행이 1954년 한국산업은행으로 전환된 뒤 행원들의 친목도모와 교양을 목적으로 발행된 잡지인 ‘산우(産友)’(1954~1971) 가운데 은행원의 생활을 말하는 지면들을 보면 민족 차별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대우가 좋았다는 얘기가 자주 등장한다. 정병욱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조선식산은행·한국산업은행원의 식민지 기억과 탈식민’이란 주제 발표에서 “해방 이전과 이후의 조선식산은행·한국산업은행을 연속하는 것으로 학력주의, 가족주의, 권력의존을 꼽을 수 있다”며 “식민지 시대 ‘조선의 경제는 발달했는데 조선인의 경제는 발달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1960년대 이후에도 유효할 수 있다는 점을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식민주의 담론에 영향을 받은 것은 역사학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중심에 두고 실증적 사료비판을 통해 그 발전과정을 인과적으로 체계화하는 근대 역사학은 개항 이후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교육제도는 물론이고 하야시 다이스케(林泰輔)의 ‘조선사’ 등 일본인들의 저서가 한국사의 체계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현채의 ‘동국사략’과 김택영의 ‘역사집략’, 심지어 장지연의 ‘대한강역고’에서도 ‘일본서기’에 근거한 ‘임나일본부설’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관련, 학술대회에선 패전 후 일본에서 진행된 조선사 연구 시각이나 방법론 등을 소개한 미쓰이 다카시(三ツ井崇) 일본 도쿄대 교수와 남·북한에서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 모색된 역사인식인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를 다룬 이영호 인하대 교수의 글 등도 발표됐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