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세상보기>사랑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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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주제는 사랑 / 이명인 지음/예담

청마 유치환은 중·고교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의 대표적 시인입니다. 그가 참 뻔뻔한 사람이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중·고교 교장으로서 가정이 있는 남자였던 그가 한 처녀 여교사와 오랫동안 사랑을 나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시조시인이기도 했던 그 여교사와 평생 서신을 통해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 편지들을 묶어 펴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두 사람의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높였지만, 과연 그의 아내 처지에서는 어떠했을까. 아들, 딸 함께 낳고 곁에서 한 세상을 함께 짊어졌던 아내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멀리 있는 사랑을 애틋이 껴안은 것이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그런 생각에 이르자, 그의 명시 ‘행복’의 절구들, 이를테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어쩌구 하는 것들이 허섭스레기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그런 생각을 무색하게 한 것은 청마의 외손자가 어느 날 방송에서 전해 준 말입니다. “어머니(청마의 딸)가 외할머니(청마의 아내)께 여쭈었대요. 남편이 세상에 알려질 정도로 외도를 했는데, 속상하지 않았느냐고. 그랬더니 외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답니다. 시인이라면 그 정도 사랑을 해야지, 뜨거운 사랑이 없이 어떻게 시가 나올까.”

소설가 이명인씨가 펴낸 책 ‘오늘밤 주제는 사랑’은 30여개의 러브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예술가, 학자로 유명한 국내외 인물들이 주인공입니다. 청마의 이야기는 없지만, 모두 그에 못지않게 절절한 여운을 주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미 알려져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체 덕분에 새로운 느낌을 주더군요.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캐서린 햅번은 아카데미상 후보에 12번이나 오르고 4번이나 수상한, 말 그대로 전설적인 여배우입니다. 햅번이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에 만난 사랑은 동료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였습니다. 지성파 배우의 대명사로 도도하기 그지 없었던 햅번이지만 트레이시 앞에선 언제나 순종하는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유부남인 트레이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26년간 거리를 유지한 채 오로지 기다리는 사랑을 했습니다. 햅번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도 트레이시의 아내가 죽은 후에야 공개적으로 입을 열 정도로 신중하게 처신했습니다.

공리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을 후원하는 남자의 아내에게 반해서 20년을 기다린 끝에 결혼에 성공합니다. 두 사람의 결혼엔 여자의 두 자녀가 증인을 섰다고 합니다. 애오라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그 열정에 자녀들도 감동을 한 것이지요.

소아성애자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여성 편력이 심했던 찰리 채플린은 53세에 만난 18세의 아가씨 우나 오닐을 일러 운명적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오닐과 결혼한 이후 아무런 여자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영화 작업에 전념, 영화사에 남을 걸작들을 만들어냈지요.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저자 이씨는 “채플린처럼 온갖 쓰레기를 담던 그릇에 내 소중한 사람을 담고 싶지 않다면 운명적인 사랑이 올 때까지 사랑의 자리를 비워둘 수 있어야 한다”고 한마디 덧붙입니다.

책에는 김기창, 박우현, 김점선, 백남준 등 한국이 자랑하는 미술가들의 사랑 이야기도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모든 장벽을 넘어서는 사랑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하는 까닭에 가슴이 또다시 먹먹해지더군요. 특히 예술가로서 자유를 뜨겁게 갈망하면서도 사랑의 구속에 기꺼이 몸을 내던지고 그 사이에서 남 몰래 갈등하는 모습이 범인에게도 공감을 줍니다.

저자는 이 모든 러브 스토리에 이런 감상을 붙여놨습니다. “지구를 통째로 들어올릴 게 아니라면 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사랑은 하지 마라. 사랑도 결국 사람 사는 일의 일부더라.…이런 나의 말은 온당하지 않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 사랑이 와도 식은 잿밥처럼 멀뚱해질 날도 있으리니.”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