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파에 묻힌 당신에게 君子는 무엇입니까

사군자 / 이선옥 지음 / 돌베개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 동양철학자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의 일화다.

한 학생이 이 철학자의 논문을 읽은 후 감상문을 담은 리포트를 제출하며 그 제목을 ‘군자주이불비(君子周而不比)’라고 했다. 논어의 한 구절로 ‘군자는 보편적인 원칙에 따라 넓게 사람을 사귈 뿐 사적인 이익을 좇아 패거리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철학자는 격노했다. 그것이 자신의 학문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본 그는 두 시간짜리 강의 내내 학생의 리포트에 담긴 결점을 비판하고 “이번 학기에 학점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강의가 끝난 후에 학생이 되돌려받은 리포트의 맨 뒷장엔 빨간 사인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주(周)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바로 너다.”

이 일화는 우리 지식인들이 ‘군자’라는 말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현실 권력을 좇는 정치인들조차도 군자답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낯을 붉힌다.

군자는 유교에서 지향하는 이상적 덕목을 갖춘 인간상으로, 곧 선비정신을 간직한 고결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군자는 광명정대한 사람이 지향해야 할 이상으로 여겨진다.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군자’라는 하나의 추상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는 데는 문인화의 일종인 ‘사군자화(四君子畵)’의 영향이 컸다.

초·중·고 시험 문제에 단골로 출제되는 사군자의 주인공은 ‘매란국죽(梅蘭菊竹)’, 즉 매화·난초·국화·대나무 등이다. 사군자화는 한때 우리나라 신문들의 신년 휘호로 즐겨 사용됐다. 사군자 그림의 상징성과 조형미가 새해를 맞는 기쁨과 다짐을 함께 하기에 적합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을 부제로 하고 있는 이 책은 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핵심적인 문화 원형 가운데 하나이자 지금도 여전히 수묵화의 소재로 사랑을 받고 있는 사군자 그림의 문화사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시대 매화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사군자화처럼 문인들의 마음을 담은 서화 활동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다.

사군자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그것에 얽힌 옛 문인들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졌던 까닭이다. 눈 속에 매화를 찾아다녔다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이나, 국화를 심고 이를 가꾸며 유유자적했던 진나라 때의 도연명, 대나무 없는 곳에서는 살 수 없다고 했던 왕휘지 등의 고사는 중국뿐만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매화시 60여 수로 ‘매화시첩’을 엮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이황의 매화 사랑이 유명하다.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名妓列傳)’을 보면, 이황이 매화의 기품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또 매화를 좋아하여 심고 가꾸었을 뿐 아니라 매화시를 읊고 매화차를 마시며 사는 곳도 매화시 백 수를 읊는다는 뜻의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 했다는 19세기 화가 조희룡 등의 일화는 그 이야기 자체로서도 흥미를 끌었다. 난초와 국화, 대나무 역시 문인들과 얽힌 일화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사군자화의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사군자가 문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 역사적 배경과 역사적 흐름을 살핀 후 수백 년에 걸쳐 그려진 한국의 사군자화 250여 점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감상한다. 시대별로 그리고 화가에 따라 다른 의미와 모습으로 그려진 사군자를 통해, 그림의 작가가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또한 어떠한 마음으로 사군자를 바라보았는지를 설명한다.

예컨대, 현재 5만원권 지폐 뒷면에 실려 있는 ‘월매도’는 조선시대 최고의 매화 화가로 불린 어몽룡의 작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그림은 굵고 곧은 매화 줄기가 오랜 풍상을 겪은 듯 모두 끝이 부러져 있고, 가지는 기운차게 뻗어 올라 잔가지에 듬성듬성 매화꽃과 봉오리를 달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不二禪蘭)’이 난초 그림을 통해 초탈의 선(禪) 경지를 표현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추사로부터 난 그림을 배운 흥선 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역정에 따라 심상을 반영하는 필법을 구사하며 개성적인 작품 세계를 가꿨다. 조선 말기 명성왕후의 친정 조카로서 민씨 세도정치의 중추세력이었던 민영익은 대표작 ‘노근묵란(露根墨蘭)’을 통해 시대에 대한 울분을 분출했다.

정조의 국화 그림인 ‘야국(野菊)’은 담백하면서도 간결하게 그려진 국화와 풀벌레의 재치 있는 표현이 돋보이는 그림으로, 문예부흥을 주도해 나간 군왕의 지혜가 엿보인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전환되는 시기에 살았던 문인화가 신위는 묵죽(墨竹)에서 당대고금을 통하여 짝할 사람이 없다는 극찬을 들었다. 그의 ‘죽석도(竹石圖)’는 나이 72세 때 그린 것으로 죽기 직전까지 선비의 기품을 간직하려 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저자는 “사람 사는 세상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랐으랴 싶지만, 모든 가치가 물질로 가늠되는 현대 사회일수록 사군자화가 지닌 상징은 밤하늘의 샛별처럼 더욱 또렷해진다”고 말했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