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비오는 날의 서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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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리 서양화가

라디오를 들으니 미국 뉴욕주 브롱스동물원에서 14일 이색적인 밸런타인데이 행사가 있었다 한다. 바퀴벌레 5만8000마리에다 연인의 이름을 새겨주는 퍼포먼스였다. 초콜릿도 녹고, 장미꽃도 시드니 영원한 건 바퀴벌레밖에 없다는 취지에서 기획한 행사라고 했다. 하지만 초콜릿은 녹아야 제 맛이고 장미꽃은 시들어야 제 맛이지, 바퀴벌레처럼 영원해서 또 뭣할 것인가?

며칠 전 백화점엘 갔었다. 식품 코너에 가득 쌓여 있는 초콜릿들을 바라만 봐도 가슴이 설렜다. 세상은 온통 젊은이들의 세상이다. 카페마다, 극장마다, 술집마다 가득 자리를 메우고 앉아 있는 젊은이들을 보며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언제나 젊음은 상대적이다. 마음이 젊은 나이 든 사람들을 위한 괜찮은 장소가 어디 없을까?

1980년대 중반 젊은 연인들의 가슴을 사로잡았던 음악그룹 ‘다섯손가락’을 기억하는가? 다섯손가락 음반 1집에 실려 있던 ‘새벽 기차’와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은 그 시절 최대의 인기곡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 나는 이미 대학원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기 위해 종로2가의 영어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전도 유망한 젊은 화가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던, 내 인생에 가장 좋은 시기였다. 하지만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문득 들려오던,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하고 감미롭게 노래 부르는 그 곡과 가사는 내 마음을 더 외롭게 했다.

‘한 송이는 어떨까? 왠지 가벼워 보이겠지. 한 다발은 어떨까? 왠지 무거워 보일거야.’ 뭐 그렇게 감미로우면서도 예민한 감성의 촉수를 지닌 다섯손가락의 노래 가사들은 신을 수도 없는 예쁜 구두처럼 듣기는 좋았으나, 들을 때마다 약이 올랐다. 그 좋은 나이에 한 송이든, 한 다발이든 장미꽃을 받은 기억은 별로 없었으니까.

그 뒤로 수많은 전시회를 열면서 나는 지인들로부터 셀 수도 없는 꽃들을 받았다. 지금은 물론 장미꽃 같은 거 선물하는 남자 좋아하지도 않는다. 사실 다섯손가락의 노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뉴욕으로 떠난 뒤에 처음 들었던 ‘2층에서 본 거리’였다.

이렇게 오래된 노래의 기억들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어느 길모퉁이를 돌다가, 우연히 들어간 오래된 카페에서, 아니 무심코 켜둔 라디오에서, 그렇게 어디선가 다시 이어진다. 바쁜 일상에 쫓겨 잠시 잊고 있었던 노래들이 다시 돌아와 귓가에 자리잡고는 그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려 주는 것이다.

얼마 전 서울 서초구의 서래마을에 있는 와인바 ‘피노’에서 다섯손가락 노래들을 작사·작곡하고 노래도 부른 이두헌의 라이브 연주를 들었다. 비오는 수요일이 아니라 청명한 토요일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지나간 날들이 그때 그 순간에 다시 살아나는 착각이 들었다. 아마도 노래란 게 그런 모양이다. 지금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저 사람이 어딘가 멀리 가자고 하면 그곳이 어디라도 따라갈 것만 같은 엉뚱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착하게 보이는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줌마 어디로 가시게요? 제가 택시 타는 데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나중에 가까운 선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니, 그녀가 웃으면서 말한다. 그녀는 예전에 조용필을 좋아해서 텔레비전에서 조용필이 노래하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레 잠이 오지 않았단다. 그래서 남편과 많이 싸웠다고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싸울 일이 아니다. 아직도 마음이 메마르지 않은 당신의 아내를 오늘만이라도 외롭지 않은 노래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면 어떨까?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아니 아주 청명한 날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한 송이든 한 다발이든 장미꽃을 선물하지는 않더라도 토요일 늦은 저녁 와인 한잔을 기울이며,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오랜 만에 기억 속의 그 노래들을 들려주는 거다.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주원이 첫사랑을 닮았다며 드라마에 몰두하는 귀여운 우리 어머니, 사실 사진 속의 우리 아버지의 젊을 때 모습도 약간 현빈을 닮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당신 곁에 있어준 고마운 사람의 마음속도 조금쯤 허락하면서, 사이좋게 늙어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