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보기관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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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호 前 안기부 차장, 울산대 초빙교수

최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정보 수집에 있어 공개 정보의 비중이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정보 활동의 핵심은 여전히 ‘훔치는 활동(stealing)’이다. 남의 서류를 훔쳐보고 남의 통신을 엿듣는 것은 정보 활동의 당연한 한 분야다. 통념적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활동은 비신사적이고 때로는 탈법적 활동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위험한 활동이기도 하다.

1929년 미국 국무장관으로 갓 취임한 헨리 스팀슨은 “신사는 남의 메일을 훔쳐봐서는 안된다”면서 당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국무부 내 암호 부서를 해체해 버렸다. 공개적이고 투명한 방법으로만 국가 기능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국제 현실을 간과한 나이브한 인식의 극치였다. 그러나 이런 스팀슨의 바람과는 달리 그 후 미국 정부는 비공개적 국가 기능, 즉 정보기관의 기능을 대폭 확대했고, 그 결과 지금은 10만명 이상의 인력이 연간 수백억달러의 예산을 쓰는 세계 최대의 정보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불거진 인도네시아 특사단을 대상으로 한 국가정보원의 정보 활동 시도는 역설적으로 국가 정보 기능의 강화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사실 국정원의 이러한 시도 자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노출되지 않아서 그렇지 세계 도처에서 유사한 시도가 끓임없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시도가 노출돼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됐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사건 하나로 국정원 전체의 정보 역량이 형편없다고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된다. 여러 가지 다양한 정보 기능이 국정원에 의해 여전히 성공적으로 작동되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실패 사례에 대해 국정원이 할 말은 없다. 대외적으로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는 ‘NCND’의 원칙적 대응을 해야겠지만 내부적으로는 철저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원래 정보활동이라는 국가의 비공개적 기능은 결코 남용돼서는 안된다. 반드시 필요할 때 필요로 하는 부문에만 투입되는 변수여야 한다. 철저한 사전 계획과 함께 만에 하나 노출 시 위험을 최소화하는, 전문 용어로 ‘뒷감당(backstopping)’ 준비가 주도면밀하게 이뤄지는 것이 정보 공작 활동의 상식이다.

이번에 국정원이 이런 정보 운영의 상식과 원칙을 제대로 지켰는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철저한 복기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더 이상의 실수가 없도록 정보 전문성을 높이는 계기가 조성된다면 이번 실패 사례는 오히려 국정원 발전에 보약(補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사건에 대한 국민적 비판과 질타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미 충분할 정도로 강도 높은 비판이 이뤄졌다. 모두 알고 있듯이 이 사건은 외국과의 관계가 연루돼 있는 사안이다. 더 이상의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오히려 뜻하지 않게 스스로 국익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정보기관의 오랜 보편적 관행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국민적 지혜가 필요하다.

일부 국정원 직원의 실수 사례로 스팀슨처럼 필수적 국가 정보 기능을 위축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공개적 질책도 중요하지만 국정원이 심기일전하여 보다 유능한 프로 정보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차분한 이해와 성원도 필요할 것이다. 격동하는 중동 정세, 그리고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한반도 안보 현실과 주변 정세로 보아 국정원의 강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국정원 전체 직원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지나치게 주눅들게 하는 과도한 반응은 이 정도에서 자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