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최은희 “자진 월북? 北서 총살됐어야 믿나”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최은희씨는 “배우가 되지 않았으면 납북 등의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울면서 탄식한 적도 있으나, 지금은 평생 영화인으로 살아온 것을 감사히 여긴다”며 “연기를 통해 다른 사람 삶을 받아들이며 모든 인생이 아름답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환하게 웃었다. 신창섭기자 bluesky@munhwa.com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최은희씨는 “허리 디스크 때문에 작년부터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치료가 잘돼 곧 일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이라고 한다. 소설책으로 담아내면 열 권으로도 모자란다고 한다. 배우 최은희(81)씨의 삶이 바로 그렇다. 그로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압축돼 있는 역정에 속으로 눈물이 솟구친다. 동시에 역사의 가시덤불을 온 몸으로 헤치고 자신의 생애를 아름답고 품격있게 지켜낸 불굴의 의지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지난 10일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에서 최씨를 만났을 때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1년 전쯤에 허리 디스크가 발병해 치료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기자와 배우로서 자주 전화 통화를 했으나, 만난 지는 오래돼서 휠체어를 탄 모습은 처음이었다. 최씨는 몸이 불편한 탓에 외출을 삼가고 있으나, 문화일보에 대한 평소의 애정 때문에 인터뷰에 응했다고 했다. 그는 장시간의 인터뷰에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모든 질문에 분명한 발음으로 정성껏 답했다. 겸허하면서도 단정한 말투는 오랜 세월 내공을 쌓은 ‘전설적인 여배우’의 품격을 새삼 느끼게 했다.

―문화일보는 옛 동양극장 자리에 지어졌습니다. 동양극장에 대한 추억이 있으시지요.

“그럼요. 일제 때부터 연극 전용극장으로 유명했지요. 해방 직후에 극단 아랑 단원으로 동양극장서 공연을 한 적이 있어요. 공연을 하고 나왔더니 그 사이에 눈이 쏟아져 전차도 버스도 끊겼더군요. 밤새 걸어서 남산 근처에 있는 집까지 간 적이 있어요.”

―곧 6·25가 다가옵니다. 아픈 기억을 되살려서 죄송하지만, 전쟁 때 북쪽 인민군에 붙들려 선전극을 공연하다가 탈출했다고 들었습니다.

“영화 ‘사나이의 길’을 촬영하기 위해 목포에 갔다가 6·25 소식을 들었어요.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왔는데,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어요. 며칠 후에 쌀을 사러 거리에 나갔다가 인민군복을 입은 북한 배우 심영을 만났어요. 제가 일제 때부터 연극, 영화를 했으니까 심영이 저를 알아봤어요. 북한 내무성 소속의 경비대 합주단에서 일해야 한다며 저를 데려갔지요. 가보니 명동성당에 200명의 예술인이 합숙하고 있었어요. 9·28 수복 후에 인민군이 후퇴할 때 평양 근교 청천강 옆 순천쯤에서 탈출했지요.”

―목숨을 건 탈출이었겠군요.

“그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나요. 어느 날 악극단 멤버 6명이 탈주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중에 배우 엄앵란의 삼촌인 엄토미(재즈 연주자)씨가 있었어요. 저도 끼워 달라고 간청했지요. 탈주하는 날, 유엔군 낙하산들이 하늘에서 무수하게 내렸어요. 마치 꽃잎이 내려오는 듯해서 어머나 하며 쳐다보고 있는데, 동료들이 빨리 피하라고 소리쳐서 급하게 옥수수밭으로 대피했지요. 그 길로 도망쳐서 청천강을 건넜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수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남자들이 옆에서 제 팔을 잡고 배낭을 머리에 이고 동동 떠내려 갔지요. 그 와중에도 이 장면을 전쟁 영화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최씨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평남 성천에서 국군 트럭을 만나 구출된다.“국군 지휘관이 정훈대를 찾아가라고 해서 정훈대장을 만났더니 함께 일하자고 요청하더군요.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전선에 남아 군인들을 위문하는 공연을 하게 됐지요.”

이렇게 전쟁을 겪어낸 최씨에게 세상 인심은 가혹했다. ‘전쟁 때 인민군에게 당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최씨는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나, 근년에 전쟁 중에 국군 헌병대장이 권총으로 위협하며 성폭행을 한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전쟁의 참상을 되새기고자 했다.

―들을수록 기가 막힌 일이로군요. 전쟁을 모르는 세대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을 듯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쳤으면 해요.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기념관도 있지만 전쟁을 잘 모르는 세대들에게 생생하게 알려주는 것은 영화가 최고예요. 정확한 참상을 담아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인간으로서 겪기 힘든 일인지 깨우쳐 줬으면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고증을 철저히 해야 해요. 요즘 영화와 드라마는 기술은 발전했는데 우리 풍습에 대한 고증이 잘 안 된 게 너무 많더군요.”

최씨는 최근에 영상자료원에서 복원한 자신의 영화 ‘마음의 고향’을 다시 보며 느낀 소회를 이야기했다. “그 작품에 떡방아 찧는 장면이 나오는데 감회가 새롭더군요. 실생활에서 사라진 그런 문화는 영화를 통해 후세대들에게 전해지니 고증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온통 우리 전통문화를 말살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요. 고증을 너무 형식적으로 하니까 눈에 거슬리는 게 참 많아요. 예를 들어 한복을 입는 격식이 있는데 요즘엔 영화고 드라마고 전혀 무시하고 적당히 합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전쟁 후의 최씨의 삶은 언제나 신상옥 감독과 함께였다. 1954년 신예감독으로 떠오르던 청년 신상옥은 이미 결혼 실패의 아픔이 있는 최씨를 반려자로 택한 후 평생을 애틋하게 사랑하고 존중해 줬다. 중간에 배우 오수미씨와의 스캔들이 있었으나, 저 유명한 납북과 탈북 사건을 함께 겪어내며 두 사람의 숙명적 애정은 더욱 공고해졌다.

―1992년 교통사고로 타계한 오수미씨에 대한 감정이 복잡할 듯합니다. 오씨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잘 키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수미와는 악연이지만, 생각하면 참 안됐어요. 아이들과 함께 수미를 위해 미사를 드리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모두 훌륭하게 성장해줘 너무 고맙습니다. 상균이는 미국 국무성에서 일해요.그 밑의 승리는 서울에서 잘 살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정균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감독으로 일하고 있지요. 착한 큰딸 명임이는 청주에서 살아요.”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최씨는 슬하에 네 아이를 뒀다. 신명임, 정균씨는 입양한 자녀이고, 상균, 승리씨는 오수미씨가 낳았다. 최씨는 신상옥 감독과 이혼과 재결합, 납북과 망명, 귀국의 와중 에서도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신 감독은 이와 관련, 생애 마지막으로 받은 영화상 시상식장에서 “아내에게 고맙다”고 했다.)

―최은희, 신상옥 두 분이 납북됐다는 게 정설인데, 자진해서 북으로 갔다는 소문도 사라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두 분이 박정희 정권과 밀월관계에 있다가 1970년대 말에 사이가 나빠졌다는 것을 근거로 들지요.

“(목소리가 다소 높아져) 왜들 그러는지 알 수 없어요. 우리가 그렇게 해명했는 데도 믿지 않는 거는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북쪽에서 총살을 당했다면 그러지 않을 텐데 대우받으면서 영화를 만들다가 왔다니까 그것을 고깝게 보는 것이겠지요. 당시 신필름 회사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박 정권과 특별히 사이가 나쁘고 어쩌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홍콩에서 납북됐고, 신 감독은 저를 찾으러 왔다가 끌려갔습니다.”

최씨는 북쪽에서 신 감독과 함께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 ‘소금’ 등을 만들었다. 김정일의 지원을 받으며 영화인으로 대접받던 최씨와 신 감독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한 것은 늘 감시를 받으며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최씨는 “지금도 주위를 살피며 눈치를 보는 꿈을 꾼다”고 했다.

―신상옥 감독이 타계한 지 벌써 5년이 됐습니다. 요즘도 그리우십니까.

“그럼요. 시간이 갈수록 더 그리워요. 요즘도 꿈을 많이 꾸는데, 항상 제 곁에 있어요. 촬영하는 장면이라든지….”(노배우의 목소리가 젖었다.)

최씨와 신 감독은 1999년 귀국 후 안양 신필름 영화예술센터를 설립해 인재 양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납북되기 전까지 최씨가 교장으로 있었던 안양영화예술학교(현 안양예술고교)의 꿈을 이어 가기 위한 것이었다. “안양예고는 저와 인연이 끊어진 상태인데, 현재 최은희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교장을 하고 계셔서 여전히 제가 관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아요.(웃음)”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 일은 잘됩니까. 재정난이 심각하다던데….

“이장호 감독 등 여러분들이 힘을 합쳐 기념행사를 매년 성대하게 치르고 있어요. 젊은 인재들을 발굴하기 위한 단편영화제인 공주신상옥감독청년영화제도 잘되고 있고요. 원로 감독과 젊은 감독의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한 무료 잡지 ‘영화 감독’도 2호까지 나왔지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재정이 바닥난 상태예요. 신 감독 영화 로열티로 버텨왔는데….”

기념사업회가 추진해 온 ‘신상옥영화역사박물관’이 예산과 부지 확보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독지가를 찾아나서야 하지만, 최씨가 돈 이야기를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은 영화계에 유명하다.

“신필름의 역사는 1950, 60, 70년대의 한국영화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촬영 당시의 기록물 등 사장시킬 수 없는 소중한 자료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후대들에게 보여줄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제게 남은 마지막 소망입니다.”

―최근 인상 깊게 본 영화나 드라마가 있나요.

“휠체어를 타고 극장에 나갈 수 없어서 최근에 영화를 보지 못했어요. 대신에 드라마를 봤는데, ‘가문의 영광’이 참 좋았습니다. 요즘엔 ‘반짝 반짝 빛나는’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고두심씨의 연기가 깊더군요. 연극을 해본 사람이라 그럴 거예요. 욕먹을 소리인지 모르지만, 요즘 드라마엔 배역과 연기자가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며느리가 시어머니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고, 아들이 어머니의 연인 같고….”

최씨는 “노련한 배우들이 나오는 드라마라야 관심이 가더라”고 했다. 그는 평소 후배들에게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로 뼈를 깎는 아픔을 이겨내야 진정한 연기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최씨는 1960년대에 한 맥주회사의 달력 사진을 찍을 때 맥주잔을 들고 있으라는 광고 사진작가의 요청을 ‘내가 기생이냐’라며 거절한 기억을 되새겼다. “배우가 CF를 할 수는 있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의 품격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기념사업회 일로 바쁘실 텐데,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장기기증 홍보대사를 맡으셨더군요.

“사람이 한 번 났다가 죽으면 뼈만 남고 부패돼서 없어지는데, 굳이 아낄 필요가 있겠나 싶어요. 전신을 기증하고 싶지만 나이 먹어서 그럴 필요는 없겠지요. 본래 제 눈이 예쁘다고들 했으니 눈만 기증하기로 했어요. 제 눈을 가져가는 사람이 광명을 찾으면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렇게 눈을 기증하는 서약을 했더니 정진석 추기경께서 홍보대사를 맡아 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지난 1년간 몸이 아파서 홍보를 위해 많이 움직이지 못해 죄송했어요. 이번 기회에 장기기증의 뜻이 널리 알려졌으면 해요.”

인터뷰 = 장재선 차장(문화부)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