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초대석>심수봉 “없었으면 좋았을 과거의 상처·아픔… 이젠 음악적 자산돼”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심수봉씨가 대전 유성구 대학로 충남대 정심화관 콘서트 무대에서 미소짓고 있다. 대전 =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군사정권 시절 질곡의 세월, 결핍·공허·슬픔·외로움을 사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녹여낸 우리 시대 가객 심수봉(56)씨를 만난 곳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 자택이었다. 3일 대전 충남대 정심화관 공연에 이어 8일 오후 6시30분 서울 용산구 용산전쟁기념관에서 데뷔 33주년 기념 70인조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야외 콘서트 ‘더(The) 심수봉 심포니(SYMPHONY)’ 준비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그를 4일 오후 8시 자택 1층 카페 ‘모리아 (MORIAH)’에서 만났다.

2∼3층은 자택과 사무실, 지하는 150석 규모의 공연장으로 쓰고 있었다. 지인들의 사랑방으로 쓰고 있는 1층 카페 이름을 성경에 등장하는 기독교 성지 ‘모리아’ 산을 본뜬 게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냥 툭 던져본 질문이었는데, ‘신앙간증’과도 같은 묵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 거부감없이 순종했고, 아브라함의 신뢰와 순종을 확인한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지 않았지요. 모리아 산은 ‘믿음의 합격증’과 같은 산이죠. 전 신앙에 대해 깊고 확실하게 체험하기를 바랐고, 늘상 진리를 찾아왔기에 더 알고 싶어 제가 직접 이름을 지었습니다.”

심씨는 “그런데 이 모리아가 요즘 이름값 좀 한다”며 소리내어 웃었다. “제 노랫말에서처럼 철저히 자기를 희생하는 등 이른바 ‘아가페적인 사랑’, 희생을 통해 성경의 귀한 가르침을 실천해 왔습니다. ‘모리아’ 자택을 얻으며 큰 대가를 치렀지만 대가 이상의 귀한 것, 즉 ‘모든 소유를 팔아서 천국을 얻는 진주 하나를 산 것’과 같은 그런 승리를 맛봤습니다.” 그는 “모리아에서 맛본 것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너무나 단순한 진리였으며, 그 깨달음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며 “인생에 가장 귀한 경험을 했고, 모리아라는 이름의 의미처럼 ‘믿음의 합격증’도 받은 것 같다”며 환히 웃어보였다.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에서 이를 직접 목격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고초를 겪으며 심씨의 인생은 꼬여갔다. 그는 계엄사에 끌려가 정신병자로 몰려 서울 한남동 N병원에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채 한 달간 감금돼 매일같이 수면제를 투여받고 잠에 드는 고초를 당했다. 중추신경이 수면제에 중독되는 바람에 정신병원을 나와서도 한동안 수면제 없이 잠을 이루지 못해 부작용에 시달렸다. 전두환 정권시절 ‘그때 그사람’이 ‘그때 그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수년간 방송출연 금지조치를 당했고, 1985년엔 ‘무궁화’의 가사가 시위를 선동한다는 ‘혐의’를 씌워 또다시 방송을 떠나는 아픔을 겪은 그다.

그런 사연 때문이었을까. ‘그때 그사람’은 지난해 한 설문조사에서 ‘여자이니까’ ‘젊은 태양’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백만송이 장미’ 등 그의 주옥같은 히트곡을 제치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가요로 꼽혔다. 이에 대한 심씨의 견해를 물었다.

“대중들이 그 노래를 좋아하는 게 저로선 신기하고, 너무 감사하고 눈물나도록 고마울 따름이에요. 저는 매니저도 없었고 상품가치를 키워줄 그런 기획사도 제곁엔 없었어요. 출연할 방송사도 없었고 툭하면 방송금지 조치당했는데…. 정말 지금의 저를 유지하게 해준 건 진정한 대중의 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전 ‘대중가수’예요. 그래서 전 대중에게 진 빚을 갚아야만 합니다.”

노래 속 ‘그때 그사람’이 누군지를 두고 항간에서는 ‘고등학교 시절 잠시 옷깃을 스쳐간 10여세 연상의 애인’이라는 등 온갖 소문과 억측이 무성했다. 누구를 생각하고 쓴 것인지 궁금했다.

“‘그때 그사람’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첫사랑일 수도, 그때 이루어지지 못한 스쳐간 사람일 수도 있지요. 구체적인 사람을 지칭했다기보다 많은 사람이 대상이 될 수 있는 대중적인 가사로 생각하면 됩니다.”

심씨는 “10·26 이후 KBS에서 연락이 왔길래 저를 존중해 출연시키려는 줄 알았는데, 매니저 말을 자세히 듣고는 진짜 믿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마도 대중들은 억압이랄까 불이익을 당하거나 뭔가 좀 안 풀리는 사람들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아요. 과거에 함께 계셨던 분들 덕을 제가 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난 9월20일 모리아에서 가진 대규모 기자간담회 때 신곡 ‘나의 신부여’를 부를 때도 그랬고, 그전에도 방송에 출연해 노래 부르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원래 눈물이 그렇게 많은가요.

“눈물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최근 방송에 흔히 보였던 눈물, 특히 기자간담회 때 흘렸던 눈물은 저에게 많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자간담회 때 보였던 눈물은 ‘나의 신부여’에 대한 저의 뜨거운 사랑과 애정의 표현입니다. 저는 사랑을 갈급해했고 그 갈급함을 노래로 표현했지요. 그래서 제 음악은 결핍에서 나오는 애절한 멜로디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음악 인생 30여년 만에 부르는 제 사랑에 대한 완결판 같은 ‘나의 신부여’를 부를 때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냥 끝없이 주는 아가페적인 사랑, 순결한 사랑, 아름다운 사랑, 사랑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었지요. 조건과 형편 그리고 육체적 사랑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랑관에 반해 제가 깨달은 단순한 사랑의 진리를 노래로 표현하고 싶었고 너무도 아끼고 숨겨놓았던 곡을 많은 기자들 앞에서 부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2009년 이후 2년 동안 휴식기를 가진 심씨가 지난 9월19일 디지털 앨범 수록곡으로 활동재개를 알린 ‘나의 신부여’는 1년 전 심씨가 전 매니저의 결혼식 때 깜짝쇼로 불러주려고 밤새 만든 노래였다고 한다.

데뷔 33년 만에 심수봉 타이틀을 단 70인조 오케스트라 협연 야외콘서트는 가을 저녁 아래 4000명의 관객을 초대할 계획이다. 50대 이상 여성가수로 자신의 브랜드를 단 콘서트는 국내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클래식 협연을 언제부터 구상해 왔습니까.

“평소 전 클래식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저의 음악을 클래식과 믹싱하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있었지요. 그것은 제 오래된 꿈이었습니다. 이번 공연에는 전곡을 오케스트라 편곡하여 70인조의 오케스트라와 대형 합창단이 함께합니다.”

―협연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완성도 높은 음악적 세계, 새로운 음악적 변신이 기대됩니다.

“이번 무대에서 국악, 재즈, 트로트, 포크, 발라드 등 많은 장르를 관객에게 보여줄 예정입니다. 이번 공연은 제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의 변화의 시작이고 또한 이제까지 관객들에게 받았던 사랑을 돌려주는 작업의 시작이기 때문이죠. 이제 많은 무대를 통해 관객들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끝없이 주었던 그 사랑을 저도 이제 끝없이 돌려줄 것입니다. 저의 음악을 사랑해준 많은 팬들과 또 열심히 일하고 있는 음악 후배들에게 돌려주고자 합니다.”

심씨의 노래에는 유난히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사랑밖에 난 몰라’가 그의 인생의 주제곡이라고 했다.

―노랫말에 시로 승화된 사랑의 시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젊은 시절 시작 활동을 많이 했나요.

“제가 시를 아주 잘 썼어요. 초등학교 특별활동 때 글짓기 반에 들어갔는데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국어를 참 잘했고 책을 많이 읽었어요. 보통 아버지가 없거나 외로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처럼, 인생에 대해 철학적이었고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제게는 절박했던 것 같아요.”

그는 “제가 너무 힘들 때 저 자신을 위로하려고 노래를 만들었지 누구를 의식해서 만든 것은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힘들 때 음악이 있어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음악은 제게 비상구이자 숨쉴 수 있는 돌파구로, 그런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요. 제 음악이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팬들에게 위로도 됐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심수봉 음악세계’는 트로트에 치중해온 게 사실입니다. ‘트로트의 여왕’으로도 불렸는데요.

“트로트는 그저 한 장르일 뿐이고 제가 좋아하는 음악은 뭔가 틀을 정해놓고 하는 건 없습니다. 그때그때 뭔가 당기는 것, 리듬의 변화라든가 시대의 흐름도 무시못하고요. 예전에는 느린 곡이 편안했다면 요즘에는 다양한 리듬으로 흥을 갖게 하는 음악 등 저는 비교적 장르를 넘나들면서 그때그때 좋아하는 음악, 관심이 가는 음악을 다양하게 만들어 불렀어요. 사람들이 저더러 ‘심수봉만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저는 소박한 대중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지금에 와서 보면 제 상처나 과거에 있지 않았으면 좋았을 그런 아픔들, 제가 계획하지 않았던 그런 것들도 그 당시에는 쓸데없는 것같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게 다 저에게는 일종의 음악적 자산이 될 수도 있고, 사람과의 관계나 영혼에 대해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증조부 때부터 4대에 걸쳐 160개의 음반을 발매하는 등 ‘민속학의 바흐’라고 불린 집안에서 자라 소리에 대한 남다른 소명 의식이 있다는 심씨는 “음악에서 더는 ‘한’이라는 말은 안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근 “한(恨)의 노래는 생명력이 없다. 용서와 화해,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는데 계기는.

“소리꾼 집안에서 태어나서인지 저는 소리에 대한 부름, 소명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소리도 들어서는 안 되는 ‘뇌신경 인플레’라는 병에 걸려 무인도에서 요양한 적이 있어요. 그 때문에 소리에 대한 연구 아닌 연구를 하게 됐는데 폭언을 듣고 눈이 충혈돼 왼쪽 눈을 실명할 뻔해 수술을 통해 겨우 회복한 적도 있어요. 소리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강력한 무기구나 하는 걸 깨달았지요. ‘한’은 전통 유산이긴 하지만 결국 억울함이라서 그 속에 상처와 미움과 용서못함이 있어 소리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이번 공연 장소를 용산전쟁기념관에서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전쟁기념관 맞은 편에 있는 국방부는 군사재판을 받던 육군본부(지금은 육·해·공군본부가 충남 계룡시로 이전했다)가 있던 곳이라 감회가 남다를 텐데요.

“야외공연장을 물색해 선정하고 답사를 가보았는데 마침 육군본부가 있던 국방부가 보였습니다. 이번 공연은 정말 우연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저의 오래된 상처는 대부분 치유됐지만, 이번 공연이 아직 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상처의 잔재까지 치유하는 좋은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무대에 서서 저의 아픔의 산물인 그 건물을 바라보면 정말 만감이 교차하겠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큰 상처였던 그 아픔의 장소를 마음껏 축복하며 마지막 노래까지 부르려 합니다.”

인터뷰 = 정충신 문화부장 csju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