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대한민국 나라빚 결코 방심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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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경희대 국제대 교수 국제학

미국 뉴욕의 맨해튼 타임스퀘어에는 미국 국가부채시계가 서 있다. 1989년에 한 사업가가 세운 것인데, 미국의 국가부채와 관련된 각종 통계 수치들을 시시각각 보여준다. 물론 우리는 이 시계를 뉴욕까지 갈 필요없이 홈페이지(www.usdebtclock.org)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이 시계의 맨 위쪽 왼편에 미국 국가부채의 총액을 보여주는 숫자가 있는데, 그 숫자가 얼마 전 15조달러를 넘어섰다. 미국의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15조달러를 넘어섰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미국의 정치권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다. 지난 여름 미국의 정치권은 국가부채의 상한선을 늘리기 위한 벼랑끝 협상을 했다. 국가부도를 내기 직전에 타협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세금 인상에 반대하는 공화당과 정부 지출 삭감에 반대하는 민주당 사이에 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이 과정을 지켜본 금융시장의 평가는 싸늘했다.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미국 국채의 신용등급을 사상 처음으로 최고 등급인 AAA에서 AA+로 강등시켰다. 상하 양원 공동위원회로 설치된 이른바 슈퍼위원회는 10년간 1조2000억달러의 정부 지출 삭감을 위한 논의를 했지만 민주당과 공화당은 결국 합의에 실패했다.

최근 세계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부채위기는 미국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리스에 이어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흔들리고 있고 프랑스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국가부채위기를 해소하려면 정부의 지출을 줄이거나 수입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가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다. 정부의 지출을 줄이려면 공무원들의 월급을 삭감하거나 복지 지출이나 사업성 예산을 줄여야 하지만 이 모두 거센 정치적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수입을 늘리려면 세금을 올리거나 국유 자산이나 공기업들을 매각해야 하지만 이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있으면 세금 수입이 자연히 늘어나기라도 하겠지만 부채위기에 따른 경기침체는 이마저 기대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민주국가에서 정부의 지출은 증대시키긴 쉬워도 감축하는 건 참으로 어렵다. 정부 수입의 경우는 이와 반대다. 세금 감면 등으로 줄이기는 쉬워도 증대시키기는 어렵다. 따라서 민주국가에서는 재정적자와 국가채무위기가 발생하는 경향이 강력하다. 오늘날 국가부채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들이 모두 민주국가들인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에 비해 세계의 주요 경제 대국들 중에서 국가부채위기를 걱정하지 않고 있는 나라는 비민주 국가들인 중국과 러시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국가가 일단 부채위기에 빠지게 되면 악순환이 발생한다. 기존의 부채에 대한 막대한 이자 지급으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민간 부문의 저축을 끌어다 정부의 소비에 충당하기 때문에 경제도 활력을 잃게 된다.

국가채무위기에 관한 한 대한민국도 결코 방심할 수 없다. 1997년의 외환위기와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며 국가부채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선거 때마다 표를 얻기 위해 막대한 예산이 드는 공약들을 남발하고, 국가의 재정 지출을 공짜처럼 인식하는 사회집단들과 정치인들이 존재하는 한 국가부채도 계속해서 급속히 늘어날 것이고, 대한민국과 한국인의 미래는 그만큼 암울해질 것이다. 정치권과 국민 모두가 경각심을 갖고 국가의 부채 문제를 인식할 때가 됐다. 그러나 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앞다퉈 예산 늘리기에 급급하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대한민국 국가부채시계를 세우기라도 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내년 총선과 대선은 반드시 국가의 재정을 건전하게 만들 후보와 정당을 선택하는 선거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