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소설 ‘BANK’>(64) 제2부 바야흐로 인천시대 : 제6장 용쟁호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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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공사관 뒷길을 따라 공원까지 올라섰다.

어둠이 엷어진 부두가 한눈에 들어왔다. 작은 배들이 해안을 따라 줄지어 찰랑하였다. 새벽 고기잡이를 나가려는 어부들이 숨바꼭질을 하듯 고물에서 나타났다가 이물로 사라지고 또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세금을 걷는 해관 뒤편에는 서 객주의 전담 창고 두 개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부두의 창고 중에서 가장 크고 단단했다. 하역한 물품을 잠시 저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보부상에게 흥정을 거쳐 넘기는 것이다.

창고에서 해관을 짚고 부두까지 일직선을 그어보았다. 이제 저곳이 장래를 결정할 전쟁터다. 죽어도 저기서 죽고 살아도 저기서 살아 나와야 한다.

철호의 시선이 부두를 지나 바다를 건너 월미도의 하늘에 이르렀다. 낮고 검은 구름이 돌격전을 펴듯 숨 가쁘게 부두로 접근했다.

열 살, 인삼밭이 타오른 뒤론 추락의 연속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 몇 년을 박진태 밑에서 지내야 한다. 조계지를 달리고 부두로 나아가서 하늘로 훨훨 날고 싶었다.

텅!

고개를 돌렸다. 새벽을 찢는 경쾌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터엉 텅!

소리를 쫓아 걸었다. 세창 양행 숙사 앞 공터까지 갔다. 두 사내가 공을 주고받으면서 좌우로 뛰는 중이었다. 그들 사이엔 허리 높이의 줄이 횡으로 걸렸고, 그 줄이 끝나는 지점에서 직사각형 모양의 흰 금이 그어졌다. 공이 줄 밖으로 나가자, 그들은 분주한 걸음을 멈추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한 사람은 서상진이었고 또 한 사람은 박진태였다.

철호를 발견한 서상진이 손을 흔들었다. 철호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가선 읍을 했다.

“잘 왔다. 안 그래도 내일부턴 널 부르려고 했어.”

“어제 환영연도 늦게 끝난 것으로 압니다만…….”

“테니스라는 거다. 양이들이 무척 즐기는 운동이지. 시작한 지 석 달쯤 되었는데, 하루라도 빠지면 편하질 않아. 양이와 사귀고 경쟁하려면 저들 것을 하나라도 더 아는 게 좋아. 내일부터 새벽마다 같이 치자. 진태야! 네가 기초를 잡아줘라.”

“알겠습니다.”

“라켓은 내가 쓰던 걸 주고. 규칙은 간단하니까 오늘 중으로 외워. 이왕 왔으니 우리 시합을 봐도 좋고.”

“부두에 선약이 있어서 오늘은 먼저 가겠습니다.”

“편할 대로.”

철호는 서상진에게 다시 읍을 하고 진태를 향해서도 웃어 보였다. 새벽마다 바삐 숙소를 빠져나간 이유를 이제야 안 것이다.

청국과 일본 조계를 나누는 계단을 겅중겅중 뛰어 내려갔다. 그에게 배정된 스무명의 노동자가 창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둥글게 모여 앉아 담배를 나눠 피우며 지난밤 대불호텔에서 열린 신임부사 환영연을 얘깃거리로 올렸다. 그날 선뵌 와인과 산해진미도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단연 서운이란 기생이었다.

“꾀꼬리가 따로 없다며?”

“미국에서 살다 왔다는 소문도 돌아. 양이들과도 이야길 척척 한다던데?”

“만석동에 가면 우리도 만나준대?”

“한 달 품삯으로 노래 한 소절 들으시겠다! 좋지. 가 봐. 노래 한 곡 듣고 한 달 굶으셔.”

철호가 문을 열자 웅성거림이 끊겼다. 걸어 들어와서 무게중심에 섰다. 장씨와 눈인사를 한 뒤 나머지 장정들을 쳐다보았다. 하나같이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스무명은 모두 진태 쪽에 속하고 싶었다. 철호가 아직은 진태의 적수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 달 동안 이 편에서 일하다가 저 편이 이기면, 감독관이 된 진태에게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이었다. 철호가 인사말을 하기도 전에 불만 섞인 질문부터 튀어나왔다.

“기적을 바라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