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터미널, 최초 설계도는 ‘인간의 몸’

기계가 된 몸과 현대 건축의 탄생 / 임석재 지음/인물과사상사

백화점이나 터미널처럼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시설 중엔 에스컬레이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에스컬레이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추적해 올라가면 뜻밖에 르네상스시대의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게 된다. 다빈치가 고안한 ‘이중 교차 계단’ 스케치가 아이디어의 원천이 됐기 때문이다.

‘이중 교차’라는 개념은 서로 마주보는 두 반대 지점에서 곧은 계단이 올라가면서 중간에 교차하는 형식이다. ‘이중 교차 계단’은 출발점과 도착점을 두 곳에 둬 실내 어느 곳이든 최단 거리로 연결해 준다는 점에서 동선을 최대한 줄이고, 특히 대형 공간에서 효율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다빈치는 이런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얻었을까.

건축사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몸’이 건축의 탄생 배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설파한다. 건축의 성립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면 ‘내 몸 하나 누일 거처를 확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시대별 건축 양식의 흐름도 인간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졌다. 저자는 “애초에 사람들이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부터 몸을 모델로 삼았으며 건물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은 몸을 바라보는 그것과 같다”며 “몸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치관은 고스란히 건물에 스며들어 반영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무표정하고 삭막한 회색 상자’로 통칭되는 현대 도시의 비인간적 속성도 이같은 몸과 건축의 만남으로 풀어낸다. 저자는 다빈치와 데카르트 사상을 중심으로 기계론이 몸과 건축에 스며들어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다빈치는 인간의 몸을 기계적으로 본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며, 이를 건축과 연계시킨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인간의 몸과 정신이 일치한다는 ‘일원론’을 뒤집어엎은 주인공이 바로 다빈치다. 데카르트는 이런 몸 기계론을 이론적으로 정리해서 사상적 뒷받침을 마련했다.

중세 기독교까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일원론은 르네상스에 접어들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다빈치는 부위론과 기계론을 아울러 건축에 적용시키는 방식으로 일원론에 치명상을 안겼다.

다빈치는 인간의 몸을 부위별로 뜯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정확하게 기록함으로써 인간 몸의 작동을 기계적으로 파악하는 기초를 닦았다. ‘혈관의 나무’라는 해부도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그는 인체 조직 가운데 혈관과 신경만 부분적으로 뽑아내 기계적 작동 원리를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해부도를 완성했다. 다빈치가 남긴 이중 교차 계단과 네 방향 계단은 이 해부도를 건물의 실내 동선에 적용해서 나온 것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인 르코르뷔지에는 다빈치 해부 스케치를 토대로 추상 아방가르드 건축의 핵심으로 삼았고, 동선이 생명인 백화점과 터미널 등에 사용했다. 다빈치는 몸의 해부학 지식에서 얻은 순환 개념으로 서양 건축의 중심 줄기를 제공한 셈이다.

저자는 방대한 미학 이론과 사례 분석을 토대로 이집트 미술을 시작으로 다빈치, 데카르트를 거쳐 르코르뷔지에와 미스 반데어로에로 이어지는 건축사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펼쳐낸다. 저자는 기계론과 부위론의 문제점을 건축 자체로 국한시키지 않는다. 현대 문명의 문제점과 폐해로 직결된다.

저자는 “현대 문명이 인간의 몸을 정의하고 대하는 시각은 극단적 기계론이며 부위론이 뒷받침한다”며 “학교, 회사, 사회 등 나를 둘러싼 상위 조직은 내게 오로지 점수와 실적만을 요구하며, 효율만이 절대 선이며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내 모든 것은 철저하게 부위별로 조각나서 기계적으로 훈련되고 다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평가하는 현대 문명의 앞날은 어떤 모습일까. “기계론과 추상주의가 가정하고 세운 별도의 이상 세계가 현실을 집어삼켜 버렸다.(중략) 문명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클수록 문명이 개인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정도는 심해진다.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어진다.”

김도연기자 kdych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