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실한 정치체제 무너뜨린 건 ‘가산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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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질서의 기원 /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함규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1992년은 세계 지식사회에 메가톤급 파장을 불러 일으킨 해로 기억된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결국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으며, 이를 인류가 진화시켜온 정치체제의 마지막 형태라고 선언한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이 출간됐기 때문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적 의미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는 책의 대담한 내용은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고 세계적인 관심과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책의 저자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

세계 질서에 굵직한 변화가 있을 때마다 담대한 통찰로 논쟁의 불을 댕겼던 후쿠야마 교수의 신간 ‘정치질서의 기원’은 인간이 출현한 시점부터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혁명 직전까지 이르는 대장정을 통해 정치 질서의 발전 과정을 톺아보면서 민주주의의 약화, 강력한 정부의 부재 등 현실 정치의 현상을 통찰한다. 책은 2권으로 기획된 저작 가운데 1권이다.

책에 따르면 러시아는 권위주의로 회귀하고, 인도는 부패에 찌들어 있으며, 개발도상국의 국가는 제대로 국가 역할을 못하고, 미국은 이익집단의 기득권 주장에 발목이 잡혀 있다. 게다가 시장경제와 경제적 풍요는 “정부 따위는 필요 없어”라는 정서를 낳고 있다. 자유시장, 건강한 시민사회,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대중 지성’ 등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강력하고 질서 잡힌 정부의 역할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게 후쿠야마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특히 정치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가난한 나라는 자원이 없어서 가난한 게 아니라, 효과적인 정치 제도가 없어서 가난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강력하고 통일된 국가와 그 국가에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미국은 장기적 재정 문제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이익집단에 가로막혀 재정 축소나 증세를 엄두도 내지 못한다. 유럽연합(EU)은 재정위기를 앞에 두고도 복지정책을 축소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은 선진국 최고 수준의 부채를 걸머진 경제적 경직성을 해소하지 못한다. 후쿠야마 교수는 이런 사례들을 자유민주주의 위기의 증거로 제시하면서 책임 있는 정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저자는 동서양의 정치사를 비교하며 정치발전을 가늠하는 세 가지 제도적 조건을 국가, 법치주의, 책임정부로 요약한다. 일정한 영역 안에서 군사력을 독점하는 국가, 권력이 일정하게 행사될 수 있도록 하는 법치주의, 국민 전체를 대표해 선출된 의회에 권력을 배분하는 책임 정부. 이 세 가지 제도적 조건을 모두, 완전하게 갖추었다면 정치가 발전한 사회라고 본다.

후쿠야마 교수가 본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221년에 세워진 중국의 진나라다. 진나라는 가족이나 친족이 아니라 관료계급을 발전시켜 부족주의를 극복하고 대규모 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후 들어선 한 왕조가 몰락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가산제(patrimonialism·인정에 치우쳐 자기 친족과 친지들에게 특혜를 주려는 성향)로의 회귀를 들었다. 가산제 엘리트가 다시 국가기구를 장악하면서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진 데 몰락의 원인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중국의 사례는 정치 발전의 기원을 찾아가는 여정인 동시에 정치 쇠퇴의 기원을 탐구하는 이 책에서 심도 깊게 분석된다.

함규진(윤리교육) 서울교대 교수는 역자 해제에서 “‘도대체 정치발전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북유럽 같은, 또는 영·미 같은 정치체제를 가지기 힘든 것일까’ 등등의 물음에 답을 구하는 데 이 책이 많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선택한 유배”라고 부를 만큼 연구와 집필에 몰두해 펴낸 이 책에 대해 미국 학계의 저명한 신문 ‘크로니클’은 ‘역사의 종언’을 뛰어 넘는 명저라고 평했다.

김도연 기자 kdych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