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설날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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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규/논설위원

‘짐승은 모르나니 고향이나마/사람은 못 잊는 것 고향입니다/생시에는 생각도 아니하던 것/잠들면 어느덧 고향입니다.’(김소월 ‘고향’ 중에서)

적어도 우리의 고향은 동심의 놀이터요 마음의 보금자리였다. 그래서 요즘 같은 세한(歲寒)이 되면 고향은 귀향 귀성과 뒤섞여 설과 동의어가 된다.

우리말 ‘설’은 나이를 세는 ‘살’과 본래 같은 말이었다. 설을 쇠면 한 살 더 먹는다는 건 어원론으로 보면 말장난이다. 애초에 설은 새것을 가리키던 ‘사라’(새)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그러다 ‘새롭다’는 의미가 더 강해지면서 ‘새해의 첫날’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잡았다. 오늘에는 1월이 첫 달이지만, 과거에는 한 해의 시작을 음력 11월로 잡은 적도 있고 12월로 정한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섣달 그믐날’은 음력 12월 1일이 설날이던 시절부터 써 오던 그대로 음력 12월 마지막 날을 가리킨다. 이날은 각별한 날이다. 한 해의 끝으로, 그해를 마무리하는 의미 외에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인 까닭이다.

이날은 묵은세배로 한 해를 보내고, 다음날인 설날은 가족과 함께 맞는다. 섣달그믐날이 가족 모임날이었음을 믿게 하는 농담이 있다. ‘개성 사람들의 생일은 10월’이란 우스갯말이다. 송상(松商), 즉 개성상인과 관련된 말이다. 이들은 해마다 봄이면 빚을 내서 타향으로 장사를 나간다. 1년 내내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다가 이날이면 반드시 귀향했다. 그간 번 돈으로 빚도 갚고 그리던 가족과의 정도 나눈다. 그러니 우리의 설은 만남과 갚음과 사랑의 시간이라 할 만하다.

한국인은 이 설을 쇰으로써 비로소 나이를 한 살 더 보탠다. 자신의 생일을 기점으로 나이를 카운트하는 서양과 다른 점이다. 해마다 연륜을 더하는 식물 가운데 소나무는 한 살씩 더 먹으면 먹을수록 줄기가 굵어진다. 하지만 소나무·매화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 꼽히는 대나무는 다르다. 나이를 먹어도 더 굵어지지가 않는다. 다만, 연륜이 쌓이는 만큼 줄기가 단단해질 뿐이다. 그래선가, 한국인은 소나무나 대나무의 나이를 아울러 말한다. 나이가 늘어 ‘연세’나 ‘춘추’로 불리기 시작할 무렵이면 경험과 지식이 축적된다. 그것을 한마디로 줄여 ‘경륜(經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천하를 다스림’으로 확장됐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맞는 설 연휴에 ‘경륜’이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