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검은 슈트입고 정통 누아르 도전… 흥행실패 ‘정장 징크스’ 깨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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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정재(40)에겐 ‘슈트(suit·정장) 콤플렉스’가 있다. 정장을 입고 나온 드라마와 영화는 대부분 실패했다는 의미로 붙여진 수식이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재는 이 설명을 듣더니, “그런 것 같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드라마 ‘모래시계’를 제외하곤 딱히 화제가 되거나, 돌풍을 일으킨 작품이 없네요. 슈트를 안 입은 영화는 조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1300만 관객을 모은 ‘도둑들’에서 그가 맡은 ‘뽀빠이’도 어딘가 풀어진 반(半) 정장 차림이었다. 21일 개봉하는 영화 ‘신세계’에서 검은 정장으로 한껏 멋을 낸 그의 성적표는 과연 어떻게 될까. 그는 “그런 징크스가 제발 깨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신세계’는 전형적인 누아르 영화다. 최대 범죄 조직과 경찰 조직의 밀고 당기는 힘의 역학 관계가 복잡하게 얽혔고, 섬뜩하게 전개되는 폭력의 그림자도 예사롭지 않다. 이정재는 이 영화에서 범죄 조직에 잠입한 경찰 이자성 역으로 나온다. 범죄 조직에 오랫동안 스파이 역할을 하느라 어느새 조직원처럼 변해가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동시에, 자신을 구제해주지 않는 경찰 조직을 원망하는 답답한 캐릭터다. 언제 들킬까 노심초사하는 그의 표정은 영화 내내 관객과 함께 불안하게 움직인다.

“연기 자체가 애매했어요. 캐릭터가 이쪽으로 가야 할지, 저쪽으로 가야 할지 갈등이 많은 인물이었죠. 생각하는 연기를 한다는 게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았어요. 또 그 생각에 대한 깊이를 표현하기도 쉽지 않았고요. 연기적인 면에선 상당히 까다로운 역할이었어요.”

이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썼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감독에게 떼쓰기. 영화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여러 번의 회의를 거듭했지만 캐릭터는 계속 허공에 떠 있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이정재는 감독을 찾아가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묻고 또 물었다고 한다.

두 번째 해결책은 자신의 경험에서 찾았다. “형사도 아니고 조폭도 아닌, 이런 애매한 상황들이 제겐 없었는지 한 번 자문해봤어요. 그랬더니, 적지 않더라고요. 이를테면 좋아하는 두 형이 싸우는데, 어느 한 편을 들기 어려운 상황이라든가 두 제작사가 한꺼번에 영화하자고 제안할 때 난감한 상황들을 떠올리면서 캐릭터를 연구했어요.”

그렇게 소화한 캐릭터는 꽤 근사하게 나왔다. 그는 이 공을 최민식과 황정민에게 돌렸다. 최고의 배우들이 옆에서 그의 연기가 그럴싸하게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줬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재는 영화 엔딩 크레딧에 가장 먼저 이름이 올라가는 주인공인데도, 자신을 드러내고 미화하는 데 인색했다. 인터뷰 내내 자신을 낮추고, 다른 배우와 스태프에게 공을 돌리기 바빴다. 이유를 물어보니, “성향 자체가 ‘내 것’에 대한 욕심보다는 ‘우리와 함께’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출하게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욕심이 굉장하신 경우가 가끔 있는데, 저하고는 맞지 않는 성향인 것 같아요. 저는 일단 카리스마 있게 혼자서 끌고 가는 스타일이라기보다 희생하는 면을 좋게 생각하는 것에 마음이 움직이는 편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모래시계’의 백재희 같은 역할이 제게 잘 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신세계’에서 이정재의 표정 연기력이 최고조에 이르는 장면 중 하나가 황정민이 내부 배반자를 색출한 뒤 처단하는 신이다. 들킨다는 두려움에 떨 것인가, 억지로 발뺌할 것인가에 대한 수위 조절을 실감나게 표현해냈기 때문. 시사회가 끝난 뒤 많은 이들이 그의 이 장면 연기를 가장 많이 입에 올렸다.

올해로 연기 생활 20년째. 영화 속 인물과 실제의 그가 꿈꾸는 신세계는 무엇일까. “이자성의 신세계는 평범한 일상이었어요. 화려한 범죄 조직보다 가정에서 평범한 삶을 누리는 게 그가 진짜 원하는 세계였죠. 저의 신세계는 사실 여러 가지예요. 올해 40대에 진입하면서 뭔가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란 걸 알았거든요. 부모 도움을 빼면 제 의지와 결정으로 산 건 20년밖에 안 되잖아요. (웃음) 앞으로 제 의지대로 많은 걸 꿈꿀 수 있는, 막연하지만 나름의 신세계를 계속 만들어가고 싶어요.”

김고금평 기자 dann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