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들의 ‘글씨’에 묻어난 ‘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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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선조가 1603년 딸인 정숙옹주에게 보낸 한글편지(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와 정조가 1793년 외숙모인 여흥 민 씨에게 보낸 한글편지(아래·개인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조선 제14대 왕 선조(재위 1567∼1608)는 역대 왕 가운데 최고의 명필로 손꼽힌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왔던 중국 명나라 사신 또는 장수들이 그의 필적을 얻으려고 애를 썼을 정도였다. 1603년 선조가 딸인 정숙옹주에게 보낸 한글편지(언간·諺簡)의 경우, 한자를 섞어 써 그의 한문과 한글 글씨를 함께 볼 수 있는데, 해서체로 또박또박 쓴 것이 한문 필체로 한글을 썼음을 보여준다. 선조의 한글편지는 모두 딸(옹주)들에게 보낸 것으로, 자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배어 있다.

조선시대 왕실과 사대부가의 필사자 87명의 한글편지 400여 건을 선정해 행(문장의 줄)과 어절(연결문자), 음절(낱글자), 자모(자음과 모음)별로 분류한 ‘조선시대 한글편지 서체자전’(전 2권·다운샘)이 출간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 어문생활사연구소(소장 황문환)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조선시대 왕과 왕비, 공주, 궁녀, 사대부 및 일반 남녀가 쓴 한글편지 1500여 건을 수집·검토해 펴낸 결과물이다.

한중연 어문생활사연구소의 ‘조선시대 한글편지의 수집·정리와 어휘·서체사전의 편찬(연구)’ 사업에는 지난 5년 동안 서체학과 문자학, 국어국문학, 서예계 등의 전문가 31명이 참여했다. 한글 서예의 실현물인 조선시대 한글편지를 수집·연구해 편찬한 자전은 국내 최초의 한글 서체 자전이며 2100여 쪽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3700여 행과 4200여 어절, 3만2200여 글자, 8300여 자모가 수록된 자전은 난해한 문자 판독은 물론, 컴퓨터 폰트 개발, 패션 사업, 서체 디자인 등 예술과 산업 분야에서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자전에 실린 한글 서체로 본 조선시대 왕과 왕비, 사대부 등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 분석도 눈길을 끈다. 한중연 어문생활사연구소는 별도 자료를 통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왕의 친필 한글편지를 남긴 선조의 경우, 궁 밖에서 굶주린 백성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살펴주도록 했던 자상하고 인자한 인간성이 글씨에 반영돼 있다”고 밝혔다.

현재 조선시대 임금의 친필 한글 편지로는 선조를 비롯해 효종과 현종, 숙종, 정조의 것이 전한다. 한문 어필(御筆·임금의 글씨)의 필체가 한글에도 반영돼 있는데, 조선 제17대 왕 효종(재위 1649∼1659)의 글씨에서는 거침없고 시원한 필체를 통해 활달하고 진취적인 기품을 느낄 수 있으며 현종의 글씨에서는 아기자기하고 다정다감함을 엿볼 수 있다. 또 19대 왕 숙종(재위 1674∼1720)의 편지에서는 획 하나하나를 정성들여 써서 단정하고 올곧음을, 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의 글씨에서는 힘차고 굳은 세로획의 필체에서 문체반정을 추진했던 굳건한 의지를 살필 수 있다는 게 이종덕 어문생활사연구소 전임연구원의 설명이다.

왕비 가운데서는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의 글씨가 주목된다. 한문 서체가 한글 서체로 구현된 한글글씨에서는 글자의 중심축이 행의 중앙에 있는 데 비해, 인현왕후의 글씨는 중심축이 ‘ㅣ, ㅏ, ㅓ’ 등의 세로획을 기준으로 글자의 오른쪽에 맞춰져 있다. 이는 오늘날 ‘궁체(宮體)’로 일컬어지는 서체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글씨는 흘림체의 달필인데, 궁체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한문 서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 씨의 편지는 추사 김정희 집안의 편지에 포함돼 전한다. 추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생전, 정조가 세손에 책봉되기 전인 원손 시절에 혜경궁 홍 씨가 화순옹주에게 보낸 문안편지로, 흘림체가 ‘한중록’의 서체와 흡사하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글씨는 한문 서체적 요소가 약간 가미됐으나 궁체의 특징을 거의 다 갖추고 있다. 철종 비인 철인왕후의 글씨는 완벽한 궁체로서 조선말기의 서사상궁(書寫尙宮)들이 쓴 궁체 글씨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는 등 왕비의 글씨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고종 비인 명성황후의 한글편지는 친필과 궁녀 대필이 있는데, 친필 편지만 140여 편이 전한다. 궁체도 아니고, 한문 서체가 반영된 것도 아닌 개성적인 서체가 특징이다. 줄이 인쇄된 시전지에 글을 쓰면서 줄을 맞추는 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흘림체로 거침없이 이어 쓴 필체에서 자기만의 굳은 신념과 정신으로 일국을 좌지우지하던 명성황후의 강인한 기질이 유감없이 드러난다는 평이다,

이밖에 온전하게 전하는 공주의 한글편지로는 유일한 효종의 둘째딸 숙명공주의 글씨와 왕실의 편지를 대필했던 궁녀들의 글씨도 확인할 수 있다. 송시열과 이동표, 정경세 등 사대부들의 글씨와 부전자전이라는 말을 연상케 하는 추사와 그의 부친 김노경의 한글편지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추사에게서 배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한글편지에서도 추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