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이정학 기자 luis80@munhwa.com
푸른역사아카데미, 수유너머N, 수운잡방, 대안연구공동체, 다중지성의 정원, 파이데이아…. 크고 작은 인문학 모임이 전국에서 생겨나고 있다. 취업 면접에 대비해 인문학 ‘벼락공부’를 하는 스터디 모임도 생겨날 정도다. 가히 인문학 열풍이라고 할 만하다. 물질을 중시해 소홀히 한 정신적 측면을 되살리자는 의미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얘기하기도 하고, 폭넓은 사유를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문학 열풍의 현장을 살피고 열풍이 부는 이유,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 등을 모색했다.
“여섯 살, 일곱 살 손주가 둘인데, 가만히 보니까 결국 삶을 즐겁게 해주는 건 호기심이더라고요. 궁금한 게 없으면 열정도 사라져요. 요즘 노인 우울증도 많다잖아요. 이렇게 시내에 나와서 좋은 강의 듣고 책도 읽고 하면서 희망이 생겼어요.”
지난 10월 16일 저녁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컨벤션홀에서 개최된 ‘교보 인문학 석강’에서 만난 김광위(66) 씨의 말이다.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에 열리는 이 강좌는 지난 8월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생물학의 세기’를 시작으로 정재서(중문학) 이화여대 교수의 ‘신화적 상상력으로 문화 읽기’를 10월 말까지 진행했다. 강당 안은 금세 빽빽하게 들어찼다. 퇴근시간대여서인지 넥타이를 맨 40∼50대 남성 직장인이 절반 가까이 됐고, 10대 중·후반의 자녀를 데리고 온 주부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정 교수는 이날 중국의 홍수남매혼 신화를 물과 에로티즘으로 해석, 한국의 단편소설 ‘소나기’와 서머셋 모음의 ‘비(rain)’에 적용해 청중의 흥미를 이끌어냈다. 강연 도중 “지금부터 약간 ‘19금’입니다”라는 너스레에 강연장에 한바탕 폭소가 터진다.
김 씨는 8월부터 매주 출석하고 있다. 이날도 변함없이 강연자와 가장 가까운 맨 앞자리에 앉았다. 부동산업으로 한때 ‘돈 좀 만졌던’ 김 씨는 국제통화기금(IMF) 시절부터 16년간 택시기사를 했다. 현역을 떠난 지금은 ‘자발적’ 독서운동가로 활동중이다. 인문학 강좌를 듣는 데에는 ‘열정적인 노인’으로 살기 위한 것이지만, 독서운동가로서 직접 양질의 책을 고르기 위한 이유도 있다. 그는 매월 10∼15권의 책을 지방소재 고등학교에 보내거나 거리의 시민들에게 나눠준다.
그는 또 “버스나 지하철을 타보면 젊은 사람들은 죄다 손에는 스마트폰, 귀에는 이어폰이다”며 “이들이 스마트폰 대신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전했다. 김 씨는 현재 블로그 ‘독서 그 맛과 향(http://blog.daum.net/withgw/14)’과 ‘행복나눔 독서도미노(http://blog.naver.com/chatwithsd)’를 운영중이다.
지난 10월 15일 오후 9시가 넘은 시각.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자리한 출판사 ‘갈무리’에서는 인문학 강좌가 한창이었다. 이 출판사가 운영하는 ‘다중지성의 정원(다지원)’이 4분학기를 시작한 지 일주일째. 이날 마지막 강좌는 조명래(도시지역계획학) 단국대 교수의 ‘메트로 맑시즘(도시맑스주의)’이었다. 일의적 관계에 있지 않은 도시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서로를 반추하는 관계로 결합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게 핵심이다.
청바지 차림의 20대 학생들, 30대 여성 직장인, 40대 공기업 직원. 50대 사업가 등 열 명 남짓한 수강생의 연령과 직업은 매우 다양해 보였다. 인문학 강좌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대중적이고 쉬운 강연이 ‘소비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면, 다지원의 강좌는 ‘틈새시장’이다. 보다 깊고, 다양한 시각을 제공한다. ‘사유의 공간’을 넓혀주기 위해서다.
다지원에서 강좌도우미로 활동하며, 무료로 수강하고 있는 박인수(26·대학원생) 씨는 “미술사학을 전공하면서 현대미술에 투영되는 ‘도시 이미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도시 공간에 대해 고민하다가 여기까지 왔다”며 ‘메트로 맑시즘’을 듣게 된 이유를 전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조경설계를 공부하고 있는 장유선(26) 씨도 ‘보다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 강연을 듣는다. 장 씨는 “공간 설계에도 인문학적 배경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이 강좌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강의를 진행한 조 교수는 “사전지식과 관심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 있으니 집중도가 매우 높다”고 전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자리잡고 있는 ‘대안연구공동체(대표 김종락·대안연)’는 다양한 인문강좌뿐 아니라 대학 바깥에서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는 거의 유일한 지식 공동체다. 이곳에서 ‘중국철학사’ 강좌를 듣고 있는 서혜진(25) 씨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다”며 “이곳에서 ‘중국철학사’ 강좌에 앞서 ‘사서’ 강좌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간관계로 많은 갈등을 겪었다”며 “그때마다 ‘중국철학사’나 ‘사서’의 내용이 떠오르며 대처 방법 또한 알게 돼 이전보다 마음의 안정을 많이 되찾았다”고 동양학 예찬론을 폈다. 대안연의 ‘발터 벤야민 세미나’는 수강생들과 강사가 함께 3년 정도의 시간을 들여 일반인이 읽을 수 있는 벤야민 개설서를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공강일(36) 씨는 “수강생들이 무작정 배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강좌를 만들어 가기 때문에 수업의 열기 또한 뜨겁다”고 전했다.
김도연·박동미 기자 kdych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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