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로 그린 대나무, 바람에 일렁이는 듯…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자투리 철판을 절단기로 자르고 이어 붙인 조환 씨의 대나무 작품. 회화도 조각도 아닌 철판 작품의 그림자가 벽면 위로 수묵화나 서체와 같은 여백과 농담을 드러낸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한동안 흰 한지에 검은 먹으로 인물화와 자동차들이 빽빽이 들어선 도시 풍경을 그렸다. 흑과 백이 어우러지는 이 시대의 인물화, 산수화였다.

이즈음엔 한지와 붓 대신 검은 철판과 전기 절단기를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

한국화의 현대적 변용을 추구해온 조환(56) 성균관대 교수는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소재와 기법을 확장시켜온 작가다. 자투리 철판에 드로잉하듯 전기절단기로 철판을 자르고 이어붙여 매화나 대나무 같은 사군자와 산수화를 묘사하고, 한 획 한 획 글씨를 새긴다. 세월과 더불어 검붉게 녹이 난 철판 작품은 벽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전통 수묵화의 번짐이나 붓이 지나간 비백(飛白) 같은 미묘한 자국을 품고 있다.

단순화한 검은 선이 도드라지는 ‘철판 그림’의 작가 조환 씨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8일부터 2월 9일까지 개인전을 연다. 전시장 벽면에는 가는 줄기가 바람에 일렁이는 듯한 대나무, 하늘을 향해 꼿꼿한 자태를 드러내는 소나무,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 붉은 나팔꽃부터 암벽과 첩첩의 산세가 느껴지는 산수화가 걸려 있다. 철판 작품에선 묘하게도 산수화의 여백미와 붓글씨의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조씨는 철판 소재의 매란국죽 외에 글자와 대형 설치작품도 발표한다. 벽면과 바닥에 중국 당나라 서예가 장욱(張旭)이 쓴 ‘반야심경’ 전문 260여 자를 철판에 새긴 작품 및 텅 빈 배가 놓여 있는 어두컴컴한 중앙전시장은 해질녘 호숫가처럼 안온한 느낌이 난다, 작가는 행서와 초서의 중간 형태인 행초체로 반야심경을 철판에 글씨처럼 혹은 그림처럼 자유롭게 펼치면서, 그 앞쪽에 불교 설화에 등장하는 피안의 극락정토행 배를 뜻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까지 철판으로 직접 만들었다.

작가는 “줄곧 해오던 먹과 채색작업에서 벗어나 다른 무엇을 해보고 싶었다”며 6년여 전부터 진행해온 철판 작업을 소개한다. 20대 젊은 날 한때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의 용접기 제조회사에서 1년여 조수로 일한 인연도 있지만, 철판을 작업에 끌어들인 것은 나이 오십 즈음이었다. 늘 그렇듯 ‘소재와 기법에서 뭐 다른 게 없을까’를 궁리하던 어느 날, 청계천에서 차고 딱딱하지만 열을 가하거나 망치질을 하면 늘어나고 변형이 가능한 철이 눈에 들어왔다. 1980년대 세종대·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그는 1990년대 미국 뉴욕 아트스튜던트리그 시각예술대학 조소과에서 새로운 장르를 경험했다.

작업실에 철판, 절단기, 망치, 용접기들이 들어섰고, 철판 드로잉이 시작됐다. 철공장에서 쓰고 남은 철판 자투리를 사용해 그는 전기 절단기를 붓 삼아 작업한다. 밑그림도 없이 그저 즉석에서 쓱쓱 드로잉하듯 철판을 자르고 망치로 때려 구부리거나 용접해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

그는 “철판이 종이에 비해 묘사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추상성이 강하고 드러나지 않는 듯이 드러나는 그 함축성 때문에 작업 자체가 흥미롭다”고 밝혔다. 어둠 속에선 그저 철판이지만 빛 아래에서 그림자와 어우러지며 이뤄내는 이중적 이미지도 작업의 묘미라고 덧붙였다.

철판 드로잉의 주제로 사군자 산수화를 시도한 것은 옛 그림의 화목을 제쳐두기보다 이 시대에 새롭게 구현해보자는 의도였다. “조각도 아닌, 그렇다고 회화도 아닌” 그의 ‘철판 작품’과 관련, 일부에선 전통 한국화 전공자로서 붓을 사용하지 않는 작업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는 “새로운 시도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라고 답한다.

그는 “글씨를 쓰지 않으면 한국화가로서 마음속에 빚을 지는 느낌”이라며 정신이 맑은 아침시간이면 한지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먹작업에 빠져든다.

신세미 기자ssem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