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의 진화

여자친구, 브런치, 결혼에 얽매이지 않는 연애와 솔직한 성, 마놀로 블라닉 구두와 패션잡지. 이쯤 되면 대중문화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드라마를 떠올릴 것이다.

1998년 처음 방영된 뒤 세계적 팬덤을 일으킨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이 작품은 그 뒤 한국에서도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부터 ‘싱글즈’(2003),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2004), ‘로맨스가 필요해’(2011)와 ‘달콤한 나의 도시’(2006) 등 칙릿 소설로 이어지면서 여성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빈번하게 차용돼온 대중적 원형이 됐다. 이젠 지겨워지기까지 한 ‘섹스 앤 더 시티’ 장치가 또다시 나왔다.

한국판 40대 ‘섹스 앤 더 시티’인 영화 ‘관능의 법칙’(감독 권칠인·13일 개봉). ‘관능의 법칙’은 20년 가까이 반복돼온 ‘섹스 앤 더 시티’ 장치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답은 ‘YES’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섹스 앤 더 시티’가 보여준 성, 욕망, 여성의 자아, 소비 등이 담론으로서는 익숙할 만큼 익숙해졌지만 현실에선 여전히 구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등장인물, 이들의 관계가 뻔하지만 ‘관능의 법칙’은 흥미롭게도 숱한 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현실을 반영한 가장 진화된 형태라는 점은 분명하다.

◆40대의 성과 사랑=‘관능의 법칙’은 40대 여성의 성을 전면에 들고 나왔다. 케이블 TV PD로 연하남과 사귀는 신혜(엄정화), 남편에게 섹스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주부 미연(문소리), 딸 몰래 연애하는 싱글맘 해영(조민수). ‘섹스 앤 더 시티’와 비교하자면 신혜는 칼럼니스트 캐리(세라 제시카 파커), 미연은 섹스에 노골적인 사만다(킴 캐트럴), 해영은 보수적인 샬롯(크리스틴 데이비스)에 해당된다. 해영의 베이커리에 모여 브런치를 먹고, 노골적인 성이야기까지 포함해 온갖 수다를 떠는 모습도 그리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싱글즈’의 여주인공이 30대 직전의 29세 여성, tvN의 ‘로맨스가 필요해’에선 30대가 된 데 이어 드디어 40대로 그 연령이 높아졌다. 황진미 평론가는 “40대 여성은 이제까지 자녀를 키우는 모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며 “영화는 현실에서 40대 여성이 돌싱, 싱글 등으로 결혼에 포섭되지 못한 경우가 많아지고 결혼제도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현실을 반영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자아-일-소비-성=황미요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관능의 법칙’이 성적 표현을 노골적으로 들고 나온 것도 주의해 지켜볼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즉 자아정체성, 여성의 욕망, 직접적 성담론, 고도화된 소비주의, 명품에 대한 노골적 환호 등 ‘섹스 앤 더 시티’가 드러낸 현대 여성의 노골적인 욕망 중에서 한국의 문화상품들이 포커스를 맞춘 것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엔 ‘싱글즈’처럼 주로 일과 결혼이 모두 쉽지 않은 여성의 자기정체성 문제를 거론했고 2000년대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칙릿’ 등을 통해 노골적인 소비주의를 드러낸 데 이어 이제 여성들의 보다 자유로운 성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이르렀다는 분석이다. 황미요조 평론가는 “이제까지 영화에서 표현된 여성의 성은 대부분 남성의 시각에서 본 여성의 성인 경우가 많았다”면서 “이번 영화는 보다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봤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풀이했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