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純白의 명품 항아리 90점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종호/논설위원

‘흰 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不定形)의 원(圓)이 그려주는 무심(無心)한 아름다움을 모르고 한국미(美)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문화재에 대해 당대 최고의 안목을 지녔던 미술사학자 혜곡(兮谷) 최순우(1916∼1984)가 조선백자(白磁)의 백미(白眉)인 달항아리를 찬탄한 글이다.

‘달항아리 화가’로도 불리는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는 “조형의 미(美)를 조선백자에서 배웠다”며 “내가 그리는 것이 여인이든, 산이든, 새든 모두 도자기에서 오는 것”이라고 밝혔다. 1944년부터 수집하기 시작한 달항아리를 집 마당에 내다놓고 감상하기를 즐긴 그는 이런 글도 남겼다. ‘희고 맑은 살에 구름이 떠가고, 그늘이 지고, 태양의 농도에 따라 시시각각 미묘한 변화를 창조한다. 더욱이 달밤엔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인해 뜰에 온통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싸늘한 사기(砂器)로되 따사로운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 체온을 넣었을까?’

달항아리는 관요(官窯)에서 만든 백자대호(大壺) 중에 대체로 높이 40㎝ 이상인 대형 원호(圓壺)를 일컫는다. 어깨 부분이 둥글고 넓으면서 허리 쪽으로 길고 날렵하게 내려오는 입호(立壺)와 달리, 원호는 우윳빛의 풍만한 모습이 보름달을 닮았다고 해서 달항아리로 불린다. 하지만 17세기 후반∼18세기에 제작된 달항아리보다 앞선 시기의 조선백자가 적어도 빛깔은 더 아름답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조선백자 고유의 순백(純白)이 완성된 15∼16세기 설백색(雪白色) 자기가, 임진왜란 후 최고 품질의 백토를 구하기 어려워져 순도가 떨어진 회백색 자기는 물론, 그 후에 나타난 우윳빛 달항아리까지도 능가한다는 것이다.

달항아리를 포함해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백자 걸작들을 한자리에 모은 ‘백자호―너그러운 형태에 담긴 하얀 빛깔’ 주제의 대규모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간송미술관·호암미술관과 함께 한국 3대 사립 미술관으로 꼽히는 호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백자 중에 최상급인 90점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분관에서 지난 13일부터 오는 6월 21일까지 선보인다. ‘순백과 절제의 미’ ‘순백의 강건한 멋’ ‘순백의 온화한 둥근 맛’ 등 주제별로 나뉜 조선백자 명품들의 매력에 빠져들다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한편으로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는 표현은 이런 때에 적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