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싱 당해 분한데 금융 과실까지 입증하라고?”

직장인 L(47) 씨는 지난 20일 오후 시중 A은행 본점에 근무하는 직원이라는 사람한테서 거듭된 전화를 받았다.

이 사람은 “공인인증서를 재발급하지 않으면 바로 피싱 사기에 노출되는데 고객님 때문에 퇴근도 못하고 있다”며 본인 인증번호를 요구했다. 피싱 사기 노출이라는 말에 놀라 번호를 불러주고 난 후 계좌를 확인해 보니 3900만 원이 빠져 나가 있었다. L 씨는 “마이너스통장인데 보상 받을 길도 막막하더라”며 망연자실해 했다.

Y(75) 씨도 앞서 지난 7일 경찰이라고 사칭한 이로부터 “보이스피싱 전화가 많이 오는데 조회해 보니 지역상호금융에 1000만 원짜리 계좌 2개가 있지 않느냐. 지금 해킹 당할 위험이 있다. 다른 계좌로 우선 옮겨라”는 말에 속아 대포통장 4곳으로 2000만 원을 인출당했다. 경찰이나 해당은행 모두 지급정지 대응에서 한 발 늦은 후였다.

금융 고객정보 유출과 더불어 전자금융 사기가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는 ‘나 몰라라’식 보상 시스템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24일 피해자들과 금융권에 따르면 사기 피해 후 과실 입증 책임을 둘러싸고 공방이 이어지면서 보상을 아예 못 받는가 하면, 피해금액의 30%, 최대 50% 정도만 받아도 다행이라는 피해자들의 하소연이 이어지고 있다.

파밍 사기로 4500만 원을 사기 당한 K(53) 씨는 “사고가 나면 경찰, 금융사, 금융감독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심신이 피폐해지는데 금융사 측도 보험사정인을 내세워 반발을 무마하는 데만 신경을 쓰지,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해자 Y 씨의 가족은 “범인들이 계좌내역을 정확히 알고 있어 나이 많은 어르신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면서 “금융사는 은행 책임을 입증하라거나 정 힘들면 민사소송으로 대응하라고 하더라”고 황당해 했다.

이런 사정에다 은행, 보험, 카드 등 전 금융업권에서 대규모 고객정보 유출 사태가 속출하면서 2차 금전 추가 피해에 대한 우려가 높은 상황이어서 적극적인 피해자 구제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원장은 “인증번호 등은 어쩔 수 없이 속아 제공하는 것인데 이를 입증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고도화된 금융사기 유형을 가장 먼저 아는 금융당국이 소비자 경보만 낼 게 아니라 금융사에 피해보상 유형 및 기준을 정확히 제시해 줘야 소비자 보호가 헛구호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종 기자 horiz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