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명작들이 보여주는 ‘강렬한 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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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고 찢기고 도둑맞은 / 릭 게코스키 지음, 박종서 옮김 / 르네상스

영국 낭만파 시인 바이런(1788∼1824)이 죽자 바이런의 친구들은 그가 남긴 회고록을 불태워버렸다. 거기에 담긴 내용이 시인의 명예를 해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시인이 세상에 남기기 위해 썼던 글을 그의 친구들이 화형(火刑)에 처한 셈이다. 도대체 바이런의 회고록에 어떤 내용이 담겼던 것일까.

이 책의 저자 릭 게코스키는 회고록에 바이런의 사생활, 즉 이복누나 오거스타 리와 근친상간 관계를 맺고 있었다거나 아내와 항문 성교를 즐겼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설령 그처럼 외설적인 내용이 있다 한들,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바이런의 이미지에 더 보태줄 것이 있기나 할까? 기록의 부재는 바이런의 신화 전체에 걸쳐서 현혹적인 그림자를 드리우는 한편, 차마 말하지 못한 이야기, 추가적인 부도덕의 가능성에 대해 상상하게 할 뿐이다.”

바이런 회고록을 한 장(章)의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책은 총 15장에 걸쳐 문학과 서지학, 음악, 미술, 건축 분야에서 ‘사라진 예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자는 영국 옥스퍼드대 영문학 박사 출신으로 희귀 초판본 거래업을 평생 직업으로 택한 인물로,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게코스키의 독서 편력’ 등의 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책의 1장은 저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의 절도 사건으로 시작한다. 1911년 이탈리아의 그림 액자 제작자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훔쳐 한 호텔 방의 침실 밑에 감춰 뒀다. 루브르는 이 절도 사건으로 휴관했다가 일주일이 지나서 다시 문을 열었는데,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텅 빈 공간을 보기 위해 수천 명의 인파가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중에는 막스 브로트, 프란츠 카프카처럼 당대의 대작가들도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 빈 공간으로 이끌었을까. “과거의 모나리자가 강력한 현존이라면, 부재 상태의 그림이 오히려 더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예술 작품의 부재 혹은 실종을 이야기할 때, 영국 수상이었던 처칠(1874∼1965)이 아내와 함께 자신의 초상화를 없애버린 일은 좋은 사례가 된다. 처칠은 당시 가장 유명한 화가였던 그레이엄 서덜랜드(1903∼1980)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싫어했다. 언제나 위풍당당한 정치인이고 싶어한 자신의 소망과 달리 그림은 고약한 권위의식을 지닌 노인네의 모습을 ‘실제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탓이었다.

저자는 처칠 부부가 그림을 없애버린 것이 이해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서덜랜드가 주문받은 대로 그리지 않고 쓸데없이 진실을 담아서 주인공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잘못됐다는 논리다. ‘영국을 구원한’ 처칠을 고약한 노인네로 보이게 하는 그림의 파괴가 그들 부부에게 정당했다는 것이다.

일견 궤변으로 들리는 저자의 주장을 경청하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예술 작품도 ‘불멸’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인생의 유한함, 무상함을 새기게 하는 까닭이다. 예술 작품의 상실이 그것의 현존 가치를 보듬게 하듯이 신이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선물을 줬기에 현재의 삶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런 생각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졌고 또 벌어지고 있는 문화재 약탈에 대한 그의 너그러움은 수긍하기 힘들다. 그는 엘긴 대리석상(영국 귀족 토머스 브루스 엘긴이 아테네 파르테논에서 떼어 온)과 베냉 유물(영국 병사들이 베냉 왕국에서 약탈한) 등이 제국주의적 약탈의 상징이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약탈의 결과로 문화 유물이 안전하게 보전됐으며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감상할 수 있게 됐다는 긍정적 측면을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환 혹은 환수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재 소유권을 둘러싼 국가 간의 갈등 해결이 엄청나게 복잡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조상이 남긴 문화재를 약탈당한 후손들의 억울함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가. 뺏어간 측인 영국이 아니라 약탈당한 국가 출신이라고 해도 ‘편협한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할까.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