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이대론 안된다>‘여야합의 파기→국회일정 볼모→부실·쪽지 예산’ 舊態 반복

#1. 18대 국회 정기국회가 한창이던 지난 2010년 10월 25일. 여야가 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한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진출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 개정안의 본회의 통과가 이날 무산됐다. 유통법과 대·중소기업상생협력촉진법(상생법)은 ‘한묶음 법안’으로, 여야는 ‘유통법 선 처리, 상생법 후 처리’에 합의했지만, 민주당 지도부가 당내 반발에 부닥쳐 유통법 처리가 유보됐다. 당시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합의 파기에 대해 엄중 항의한다. 당장이라도 (유통법을) 원래 약속한 대로 처리해주기를 강력하게 요청한다”고 비판했다.

#2. 2011년 10월에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 과정에서도 여야 합의가 파기됐다. 민주당에서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를 폐지하지 않고는 비준안 처리에 동의할 수 없다고 난색을 표하면서, 합의는 끝내 어그러졌다. 황우여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합의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국민과 직접 대화하겠다”고 민주당을 압박했고,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ISD는 경제 사법 주권을 크게 침해하는 독소조항”이라면서 맞서서 국회가 장기간 파행됐다.

#3. 지난해 말에는 당시 최경환 새누리당,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가 새해 예산안 처리에 합의했지만, 박영선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등 일부 의원이 외국인투자촉진법 내용에 반대하며 재협상을 요구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준예산 편성은 막았지만, 해를 넘겨서야 예산안이 통과됐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세월호특별법 여야 재합의안을 사실상 파기하면서, 국회의 고질적 병폐인 ‘합의 뒤집기’가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번번이 뒤집어지는 ‘여야 합의’는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불신 차원을 넘어서 혐오를 느끼게 한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고질병 같은 ‘합의 파기’ 구태는 의회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요소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나아가 이어지는 ‘합의 파기 사태’를 계기로 ‘정기국회 볼모잡기’를 비롯,‘부실 예산결산→군기잡기 국감→쪽지 예산심사’로 이어지는 하반기 국회의 악습과 구태 전반에 대해 메스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야가 합의한 안건이 당내 강경파에 밀려 파기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지난 5월에는 여야 지도부가 기초연금법 제정 합의안을 마련했지만, 새정치연합 내부에서 재협상 요구가 끊이지 않아 결국 의원 전수조사를 다시 거쳐야 했다. 17대 국회 때는 여야 지도부가 4대 법안과 뉴딜관련 3법의 일괄타결을 위한 합의안을 두 차례나 만들었지만, 소속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번번이 파기됐다. 이정희(정치학) 한국외대 교수는 26일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정치의 핵심은 합의 이행”이라며 “약속을 지켜야 여야 간 신뢰가 쌓이고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국회를 안정적으로 믿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번번이 뒤집어지는 여야 합의는 그만큼 국내 의회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했다는 표증으로 국민의 정치 불신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매년 되풀이되다시피 하는 7, 8월 야당의 장외투쟁 등 강경투쟁은 9월 정기국회를 볼모로 잡는 구태로까지 이어지는 등 국회 일정을 ‘도미노식’으로 차질이 빚어지게 한다. 이번 국회도 이달 말까지 마치게 돼 있는 지난해 예산 결산 심사가 이미 물 건너간 상태에서 국감 일정이 뒤로 밀리면 12월 1일 본회의에 자동 상정하게 돼 있는 내년 예산안 심의도 자연 부실해질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예산안 법적 처리시한(12월 2일)을 또 못 지키는 구태가 되풀이되게 생겼다는 우려가 이미 나오고 있다. 올해의 경우도 1주일 뒤에는 9월 정기국회가 열리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국회 일정은 도미노식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이 교수는 “국회가 타성처럼 정기국회, 국가 살림 처리를 볼모로 잡고 있다”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없으면서 국회 일정을 도외시하는 것이 여야 의원들의 현 정치 수준”이라고 일갈했다.

정기국회와 함께 진행되는 ‘군기잡기’ ‘망신주기’‘겉핥기식’ 국정감사도 구태가 만연해 있기는 마찬가지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여야 간에 지루한 정치공방과 정국 파행, 이에 따른 부실한 국감 준비는 매년 되풀이돼온 ‘구태 국감’의 공식이다. 한 대기업의 국회·대관 담당자는 “지난해 국감 때 망신을 덜 당하기 위해 질의서를 미리 받을 수 있는지 문의하러 갔더니, 의원실에서 잡다한 사무기구를 협찬해 달라고 은근히 요구해 당황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연말 ‘쪽지 예산심사’도 구태로 지적된다. 지난해말 국회 예결특위 위원장실 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정치권의 관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쪽지 예산’을 끼워넣기 위한 지역구 국회의원 보좌진들로 위원장실 앞 복도가 문전성시였기 때문이다. 이옥남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치실장은 “정기국회 볼모잡기를 시작으로 부실 예산결산, 군기잡기 국감, 쪽지 예산심사로 이어지는 악습의 고리를 이번 국회에서는 반드시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일훈 기자 on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