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1월 5일 일본 나라현립미술관에서 열린 ‘다이고지키’전에 공개된 칠지도 실물. 백제왕이 일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이 철제 칼은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으며, 이 전시회의 가장 핵심 유물이다. 관람객들이 매우 진지하게 칠지도를 살피고 있다.
황국(皇國) 혹은 신국(神國). 태평양전쟁을 기점으로 생겨난 일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전쟁은 끝났고, 쇼와(昭和·1926∼1989)도 없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에서는 천황가의 소식을 알리는 잡지가 꾸준히 팔리며, 일거수일투족을 전한다. 이 ‘천황국’에서 모두가 외면한 천황의 발언이 있다. 아키히토(明仁), 바로 쇼와의 장남인 현 헤이세이(平成) 천황이 지난 2001년 간무(桓武·737∼806) 천황의 생모가 백제계임을 인정하고 “천황가의 혈통에 백제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고 밝힌 ‘사건’이다. 이는 아사히(朝日)신문에만 아주 작게 실리는 ‘파장’을 일으켰다.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이어진(혹은 그래야만 하는) 천황가가 한국의 친척쯤 된다고 하니 말이다. 전문가들은 이 발언이 양국 관계에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쇼와로 대표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지금의 천황을 구분해야 하고, 고대 천황의 지배질서 속에 편입된 백제·고구려 왕족이 상당수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메이지(明治) 가 만든 ‘천황’이라는 도식 속에 모든 걸 집어넣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규슈 우사 신궁에서 보관 중인 ‘조선종’. ‘철의 신’을 모시는 이 신궁의 대표 상징물이다.
다소 ‘순진했던’ 헤이세이 천황의 말은 이 같은 ‘극복 사관’을 역행하는 것이지만, 우호적인 한·일 양국 관계를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우열을 나누는 ‘과거사 작업’으로는 더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라고 명명한 재러드 다이아몬드(지리학)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의 저서 ‘총, 균, 쇠’의 논지는 이를 강하게 뒷받침한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 책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글에서 “지루하게 끌어온 신화를 탈피해 그들의 연원에 대한 답을 구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며 일본 고고학계를 꼬집었다. 그러면서 “냉철한 논쟁이 힘든 이유는 과거에 대한 해석이 일본인의 현재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누가 문화적으로 우월한가, 미개한 야만인은 누구이며, 땅에 대한 역사적 당위를 내세울 수 있는 나라는 어디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교본인 ‘니혼쇼키’는 ‘과장된’ 우월의식을 표출하고 있지만, 실제로 당시 일본은 한반도의 5개의 나라(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 발해)와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했다. 가야와 백제에 대해서는 우호적이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적대관계로부터 우호관계로 전환했고, 신라는 일관적으로 적대시했다. 연 연구실장은 “신라적시관의 근원은 왜(倭) 왕권과 친연관계에 있던 가야,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것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다”고 설명했다.
◇한·일 고대사에 도색된 천황제 이념을 걷어내고=지난 10월 24일부터 11월 12일까지 나라(奈良)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제66회 쇼소인(正倉院)전에서는 고대 일본 귀족들이 신라 교역품 구매를 요청한 문서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가 전시됐다. 쇼소인은 나라 시대 보물창고로서, 일 년에 단 한 차례 극히 일부만 일반에 공개한다. 일본 전역에서 해마다 30만∼40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가 높다.
11월5일 방문한 나라국립박물관. 30여 분을 기다려 입장한 쇼소인전에서 ‘매신라물해’를 찾았으나, 문서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관람 차례는 쉽게 오지 않았다. 1300년 전에 기록된 명료한 문서 앞에 누가 우월한가, 열등한가를 따져 묻는 건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헤이세이 천황이 언급한 백제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공교롭게도 이날 나라국립박물관 바로 앞에 자리한 나라현립미술관에서는 칠지도가 전시 중이었다. 1873년 나라 인근 텐리(天里)시의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에서 발견된 철제 칼, 칠지도는 백제왕이 일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53년 일본의 국보로 지정됐다. 한·일 고대사 쟁점 중 하나인 이 칼은 주로 모조품이 전시되며 실물 공개는 매우 드물다. 미술관의 관람객들은 이 고대의 유물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등 매우 깊은 관심을 보였다. 미술관에 앞서 방문한 이소노카미 신궁은 이 칠지도로 된 부적을 판매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기념품이 이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역사적 사실을 찾기 위한 연구 작업은 계속돼야 하겠지만, 정치적 해석을 걷어낸 고대사 속에서 한·일 양국 사이에는 끊임없는 교역과 교류의 관계만 남는다.
11월 6일에 방문한 규슈(九州) 우사(宇佐)의 우사 신궁. 904년 통일신라에서 제작된 동종(銅鐘·일본명 조선종)이 보관돼 있다. 일본 국가중요문화재인 이 종은 이날 우사 신궁 박물관에서 특별 전시 중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일본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에 진출,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했다는 설)의 주인공 진구(神功) 황후가 탔다는 ‘신거(神擧)’ 등 ‘가상’의 유물들과 나란히 있는 모습은 약간 어색했다. ‘니혼쇼키’의 ‘신라 극복 사관’이 전시장 안에서도 계속되는 것. 박물관 관계자는 “우사 신궁의 핵심 문화재이기 때문에 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모셨다”고 말했다.
종이 건너온 시기를 일본에서는 9∼10세기로 보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때나 그 이후 약탈에 의해서라고 추정한다. 우사 신궁은 일본 전역 4만4000개 하치만(八幡) 신사의 총본산. 손승철(사학) 강원대 교수는 “고대 말에서 쇼와 군국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신의 상징으로 여겨진 하치만 신은 본래 가야 도래계 대장장이 신이었다”고 말했다. 고대 한·일 관계는 이토록 복잡하게 얽혀 들어간다.
나라·텐리·우사 = 글·사진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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