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퇴적 분노’와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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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수 / 논설위원

중국 전국시대에 현자로 유명했던 80세 노인이 100리를 걸어 진(秦)나라의 무왕(武王)을 방문했다. 왕이 도성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느냐고 물어보자 “처음에는 목표를 향해 열심히 걸었기 때문에 90리를 열흘 만에 올 수 있었는데, 10리를 남겨놓고는 다 왔다는 생각에 맥이 풀려 기진맥진한 상태로 또다시 열흘을 걸어야 했다”고 말했다. 나라의 세(勢)가 커지자 교만해진 무왕에게 던진 노인의 이 같은 충고에서 유래한 말이 ‘행백리자 반구십(行百里者 半九十)’이다. ‘100리를 가려는 사람은 90리를 가고서 이제 절반쯤 왔을 뿐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젊은 시절에 많은 업적을 쌓았어도, 노년의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평생을 참아온 억압과 욱하는 기질을 노년의 마지막 10리를 가는 도중에 자제하지 못하고 폭발시키는 노인이 많은 사회는 불행하다.

‘무서운 노인’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 2월 27일 화성에서 75세 전 모 씨가 엽총으로 ‘너 죽고 나 죽자’며 80대 형과 형수, 파출소장을 살해한 뒤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2008년 토지 보상에 불만을 품은 69세 최모 씨에 의한 숭례문 방화 사건과 지난해 70대 노인의 도곡역 방화사건을 돌이켜 보면, 정말 어이가 없을 뿐이다. 노인들의 방화는 화를 극단적 폭력이나 공격적 행동으로 폭발시키는 전형적인 ‘충동조절장애 범죄’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이미 10년 전에 ‘폭주노인’ 문제로 시끄러웠다.

노년기 삶의 유형을 은둔형, 자학·분노형, 성숙형으로 나눌 수 있다. ‘지혜라는 교과목의 교사’답게 봉사하는 제2 인생을 사는 성숙형 노인이 훨씬 많다. 하지만 노인 범죄가 생계형에서 강력형으로, 경범죄 중심에서 중범죄 중심으로 악성화하는 추세를 방치해선 안 된다. 2003년에 적발된 60대 이상 노인 강력 범죄자 수는 5년 전에 비해 140%나 증가했다. 요즘에는 40대, 50대 못지않은 순발력과 체력을 과시하는 노인이 많다. 물건을 훔친 뒤 도둑을 잡으려는 장년층 슈퍼마켓 주인보다 훨씬 빨리 달아나는 노인 범죄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오랜 기간 쌓여 오다 주로 주변 인물들을 향해 폭발하는 노인들의 ‘퇴적(堆積)분노’는 사회적 병리 해소 차원에서 맞서 싸워야 할 적(敵)이다. 사회적 역할이 축소되면서 느끼는 굴욕감, 은퇴 이후 경제난 등이 노인 충동조절장애를 일으키는 요인들이다. 전문가그룹 등이 나서서 노인들과 가족, 친인척, 지인들 간의 관계 갈등을 풀기 위한 종합적 대책을 마련해야 하며, 지역사회의 가족 상담 프로그램도 늘려야 한다. 노인들 스스로도 야수적 본성에 맞서는 조절력을 키워야 한다.

조선의 대학자 장현광은 ‘네 가지 노인의 법칙’을 권면했다. 언어를 그치고, 경영을 끊고, 마음을 비우고, 세월에 맡기라. 100세 시대. 노년의 시기가 짧지 않다. 제2 인생을 위한 신기술 교육프로그램 확대와 노인 문제에 대한 통계학적 해부가 선행과제다. 노인 범죄 문제의 본질과 기전부터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초고령사회 진입 이후 세대 갈등과 노인 범죄가 화학적 융합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눈뜨고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