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한국은 ‘철부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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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 문화부 차장

뇌섹남, 모루밍족, 앵그리맘, 금사빠녀….

최근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우리 시대 신어 334개 중 몇몇 예이다. 뇌섹남은 지적으로 매력적인 ‘뇌가 섹시한 남자’, 모루밍족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물건을 살피고 쇼핑은 모바일로 하는 알뜰 쇼핑족을 이른다. 요즘 방영 중인 드라마 제목이기도 한 앵그리맘은 자녀 교육과 관련한 사회 문제에 분노해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선 여성, 금사빠녀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여자를 뜻한다. 신어에 담긴 우리 사회 트렌드와 지향하는 가치들이 참으로 흥미롭다.

신세대 트렌드인 ‘말 줄임’의 묘수를 발휘한 신어들을 살피다 보니 단어는 그대로 있지만 세태 변화에 따라 뜻이나 뉘앙스가 바뀐 단어들에 관심이 갔다. 예를 들어 ‘착하다’가 그렇다. 최근 한 방송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다가 심사위원의 심사평이 귀에 꽂혔다. 심사위원은 참가자에게 노래를 잘했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며 “노래가 착해요”라고 말했다. ‘착하다’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뜻으로 사람의 심성에 대한 평가를 나타내지만, 이제 그저 상냥한 것은 좋은 덕목이 아닌 모양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게 최고 가치인 시대에 선한 것보다는 튀는 개성이, 그냥 착한 것보다 오히려 좀 못된 것이 더 나은 평가를 받게 됐다.

그러고 보니 ‘철들다’도 가치 추락을 당한 단어다. ‘사리를 분별해 판단하는 힘이 생김’을 뜻하는 ‘철들다’는 어른·성숙·성장과 동의어로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제구실 못 하는 이에게 ‘제발 철 좀 들어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이제 철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쿨’하고 ‘멋진’ 것이 됐다. 배우, 가수, 베스트셀러 저자, 성공한 기업가도 “철들지 않으려 노력한다”거나 “내 성공의 비결은 철들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철들지 않음’은 젊음, 특히 정신적 젊음을 유지하고, 열정과 에너지를 잃지 않는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뜻이 됐다. 새로운 뜻을 얻은 일종의 신어다. 하지만 한 걸음 떨어져 보면 결국 젊음에 열광하는 사회의 반영이며 누구도 제대로 나이 드는 것이 얼마나 멋진지 보여주지 못한 결과 같기도 하다.

얼마 전 번역·출간된 일본 정신과 의사 가타다 다마미(片田珠美)의 ‘철부지 사회’는 이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 이 시대는 아이는 물론 어른도 성숙하지 못한 ‘전국민 철부지’ 사회라는 게 책의 진단이다. 어른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유아적 만능감’을 버리고 세상과 자신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확보하는 것인데, 욕망과 경쟁의 시대에 나이 들어도 관조적 시선은 물론, 제대로 포기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철부지 사회에서 어떤 어른도 성숙한 어른의 모델을 보여주지 못해 철부지들의 악순환은 계속된다고 했다.

젊은 열정과 정신적 긴장을 유지하겠다는 ‘철들지 않는 것’을 곧바로 전국민 철부지 사회로 연결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정치 문제가 터져나올 때마다 그 어디서도 성숙한 어른을 보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신어를 살피다 우리 시대는 철들지 않는 영원한 청년만큼이나 제대로 철든 어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