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한국문화의 1번’입니다”

50번째 책 ‘禮로 지은…’ 출간 임석재 교수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근정전 위층 기단의 북서쪽 모서리에서 바라본 북악산(오른쪽)과 인왕산(왼쪽). 밖에서 볼 때 느끼던 두 산의 험한 위세보다는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이런 시야까지 신경을 쓴 것일까. 궐내에서 두 산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인물과사상사 제공

우리가 건축에 대한 인문적 식견을 갖는 데 길을 내고 닦아 온 임석재(54·이화여대 건축학·초상) 교수가 드디어 50권째 저서를 써냈다. 문학이나 인문학까지 포함해, 게다가 건축학자가 이 정도 책을 낸 유례는 나라 밖에서도 드물다. 그의 책들이 각기 내용이나 분량에서 만만치 않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데, 쉰 번째 책 역시 900페이지 가까운 ‘예(禮)로 지은 경복궁’(인물과사상사)이다. 동양미학으로 읽어낸, 경복궁에 관한 ‘완결판’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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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인터뷰한 임 교수에게 지금까지 낸 책의 총 원고 분량을 물었더니 따로 계산해 보진 않았단다. 그는 “펴낸 순서대로 외우기는 어려워도 제목을 거의 댈 수는 있다”며 “1995년 비엔나 아르누보 건축을 두 권으로 다룬 ‘추상과 감흥’을 첫 책으로, 그동안 200자 원고지 10만 장 가까이 쓴 듯하다”고 돌아봤다. 2003년부터 6년간 다섯 권으로 그의 근기(根氣)를 보여준 ‘임석재 서양건축사’는 전문성은 물론 대중적으로 자신을 알린 작품이었고, 이후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 ‘기계가 된 몸과 현대건축의 탄생’ 등 건축과 인문학, 한국과 동양의 미를 아우르는 책들을 20년간, 매년 두 권 이상 꼴로 펴낸 셈이다.

임 교수는 서울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미시간대와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건축사로 석·박사를 했다. 다 그렇진 않아도, 보통 글쓰기는 이과(理科)보다는 문과(文科) 쪽이 수월하다. 임 교수는 “이미 고교 때 건축에 대한 인문적 관심이 있었고, 시를 쓰거나 이상, 박인환, 박종화 등에 빠져 있던 ‘겉은 이과, 속은 문과생’이었다”고 했다. 대하소설도 잡으면 두세 번 완독할 만큼 책에 빠진 경험들이 그의 창작작업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만 한 다작(多作)을 하자면, 뭔가 저자의 기질도 받쳐 줘야 하고 다른 희생도 따르는 등 남다른 배경이 있을 법하다. 그는 세 가지 정도를 솔직히 들려줬다.

“기질적으로는 어머니의 외골수를 닮았어요. 지금은 편하지만, 성장기에 심리적으로 힘든 일들이 있었는데 연구와 글쓰기에 몰두하는 것을 심리적 도피처로 삼은 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 배경도 있고요. 대학 때인 1980년대 초반 정치적 격변기에 갖게 된 부채의식도 있습니다. 사실 건축 계통 학계도 여러 유혹이 많은데, 그런 데 휩쓸리지 않겠다, 술을 먹는다든가 사회생활에 필요한 비즈니스를 포기하겠다, 정직하게 ‘본업’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겠다는 거지요. 그런 것들이 저의 지속적인 작업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번에 나온 ‘예로 지은 경복궁’은 원고 분량만 3500장, 본문 도판이 213개, 본문 표는 53개에 달할 만큼 대작이다. 사진은 본인이 직접 찍었다. 편집부 직원 4명이 붙어 1년 가까이 작업했다. 지금까지 경복궁에 관한 책들이 많지만, 관련 용어해설이나 조선왕조실록 중의 관련 부분을 재탕·삼탕하며 내용이 다시 복제되는 게 대부분이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그 점에서 이번 임 교수의 ‘경복궁’은 내용과 규모에서 차원이 다르다.

“경복궁은 ‘한국문화의 1번’입니다. 세계에서 이처럼 하나의 철학과 미학이 관철된 건축물은 없어요. 독자들이 경복궁 곳곳에서 ‘플러스알파’를 찾아볼 수 있도록 썼어요. 애초 5000장 분량이었는데, 출판사 사장님이 ‘기절’ 직전까지 가는 바람에 줄여 나왔어요.”

자주 경복궁을 찾지만, 휙 둘러보고 나오는 게 아쉬웠던 독자라면 이 책을 곁에 두고 천천히 보면서 찾으면 새로운 눈이 떠지거나 몇 배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다. 임 교수는 근정전의 토템 기둥이나 원시 누각, 한북정맥의 끝자락을 왕비가 머물던 데로 끌어와 왕손의 번창을 기원했던 교태전 뒤 아미산 등을 경복궁에서 놓쳐서는 안 될 곳으로 추천했다.

요즘 경복궁 주변, 도심 중의 도심에 하루가 다르게 건물들이 증개축되고 있으나, 그 모양새는 경복궁같이 정겹지 못하고 거칠다. 임 교수는 “경복궁처럼 옛 건물들은 하나를 짓더라도 정신적 배경이 있었어요. 최근에는 자본과 기술, 그래서 효율이 건축의 전부예요. 옛 건물이 상징체라면, 요즘은 사람의 영혼을 울리는 아우라가 없는 기계 덩어리지요. 그게 현대 건축의 비극이고, 특히 우리나라가 심하다고 할 수 있죠”라고 했다. 건축사를 공부하고 가르쳐 왔지만, 임 교수가 집을 짓는다면 어떻게 지을지 궁금하다. 그는 자신의 건축설계로 작품을 남길 기회를 보고 있다. 그는 “옛 한옥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건 의미가 없고, 현재 유행을 따라 하기에는 첨단 감성에 호소할 자신이 없다”며 “한옥에서 현대로의 전이과정 중에 미학적인 부분을 좇아 지을 것”이라고 했다.

엄주엽 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