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꾸라진 1000년의 비밀’ 밝혀질까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0일 경주 남산 열암곡마애불의 모습. 암석의 변이를 관찰하기 위한 각종 변화감지 계측기가 달려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가까이서 촬영한 불두(위 사진)와 마애불이 새겨진 거석의 모습(아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오뚝한 코·날카로운 눈매
8세기∼9세기에 제작 추정
1030년 지진때 무너진 듯

세계문화유산 남산 길내기
80t 화강암 이동 최대 난관
경주시 기술연구 용역 시작

2007년 5월 경주 남산. 열암곡석불좌상 (경북 유형문화재 제113호)의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하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동남쪽으로 30m쯤 떨어진 경사면에서 크고 길쭉한 바위를 발견한다. 본래 돌산인 남산에서 발에 차이는 게 암석이지만,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고고학자의 ‘감’. 바위 사이의 경사를 따라 반쯤 엎드려 기어 올라간다. 찰나였다. 바위 아랫면 울퉁불퉁한 가공의 흔적을 포착한 것. 며칠 후 이 거석은 ‘1000년의 신비, 5㎝의 기적’이 된다.

당시 국내외 대서특필된 열암곡마애불상으로, 이 마애불은 땅을 향한 채 엎어져 있었지만 바닥에서 간신히 5㎝가 떨어져 얼굴의 훼손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마모된 통일신라 불상에선 보기 힘든 오뚝한 콧날과 날카로운 눈매. 한동안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울 방안이 다양하게 검토되었으나, 난제가 많아 2012년 ‘보존’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이 마애불이 1000년 전처럼 남산에 다시 우뚝 설 전망이다. 경주시가 본격적인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기 때문. 연내 중간발표를 한 후, 내년 봄 최종 입불(立佛) 여부가 결정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마애불의 3D 스캔 리모델링 사진.

◇우연히 손에 ‘잡힌’ 마애불의 옷자락…견뎌온 시간은 =“이상한 기분을 느껴 바위 옆에 덮인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일부 걷어낸 후 틈 사이로 손을 넣어 바위 표면을 더듬어 보니 (중략) 다름 아닌 마애불상의 발과 옷자락이었습니다. 100년을 살아도 한 번쯤 있을까 말까 한 이런 행운이 고고학을 하는 저에게 일어나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박소희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 최초 발견한 마애불은 5.4m 높이, 80t에 달하는 거대한 화강암에 새겨졌다.

지난 10일 보존 현장을 함께 둘러본 김동하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에 따르면 제작 시기는 8세기 후반∼9세기 후반. 김 연구원은 “연구자마다 약간 차이를 보이지만, 2005년에 불두(佛頭)가 발견돼 복원된 열암곡석불좌상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석굴암보다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석가탑 무너진 그해, 마애불도 넘어진 걸까 = 바닥과의 경사는 35도. ‘고꾸라진’ 경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024년과 1038년에 경주 지역에 큰 지진이 있어 석가탑이 무너졌다는 묵서지편(墨書紙片) 기록을 근거로 비슷한 시기에 엎어진 걸로 추측된다. 정민호 경상북도 문화재전문위원은 “마애불 뒤로 더 큰 돌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다른 돌에 밀린 건 아니고 아래에 박힌 돌의 변화 때문에 엎어진 걸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정 위원은 “암반은 보통 금이 가도 즉시 갈라지진 않고,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부서진다”며 “조짐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균열·박리·변색·풍화 등을 상시로 살피는 변화감지 계측기를 곳곳에 설치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한때 “아들 낳는다”며 수많은 관람객들이 마애불의 코를 만지곤 했으나, 지금은 보호를 위해 세워둔 가설 덧집 밖에서만 볼 수 있다. 불상에는 지속적으로 미미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지만 오차범위 내여서 ‘아직’은 안전하다.

◇오뚝한 코·날카로운 눈·동적인 발…“통일신라 미술의 또 다른 면” = 열암곡마애불상은 소발(민머리 형태)의 머리에 높은 육계(정수리에 상투처럼 솟은 부분), 타원형 얼굴에 오뚝하게 솟은 코, 길고 날카로운 눈매,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을 하고 있다. 신체 비례는 4등신이다. 임남수 영남대 미술학부 교수의 논고 ‘열암곡마애불상과 남산’(2010)에 따르면 이는 경주 남산에서 흔히 보는 마애불상의 특징. 그러나 임 교수는 마애불이 두 발을 좌우로 벌리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발끝을 벌리는 예는 보살상에서나 드물게 볼 수 있기 때문에 희귀한 사례다. 또, 오른손 손등을 바깥쪽으로 하여 엄지를 몸의 안쪽에 넣고, 나머지는 아랫배에 대고 있는 수인(手印·손 모양)과 편단우견(偏袒右肩·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차림)의 착의법 등에 근거해 “석굴암 본존상을 비롯해 통일신라 시대에 크게 성행한 항마촉지(降魔觸地·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펼쳐 무릎 위에 올려놓은 모양)나 다리 부분의 양감을 중시한 통견(通肩·양어깨를 모두 덮는 착의법) 등과는 양상을 달리한다”며 “통일신라 시대 불교미술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80t 마애불, 기다림 보다 무거우랴…입불 방안은 = 경주시가 진행 중인 연구 용역의 핵심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마애불이 본래 서 있던 위치를 찾고 △80t을 일으켜 세울 장비를 물색하고, △그 장비가 들어 올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난관이 많다. 남산은 경주유적지구 중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길을 함부로 낼 수 없다. 게다가 열암곡은 칠 분 능선. 어떤 장비를 세워도 복원 공사엔 최악의 조건이다. 길을 닦지 않아도 되는 건 헬리콥터를 이용하는 건데, 이 역시 현재 최대 40t까지만 가능한 걸로 알려졌다. 경주시 문화재과에서는 “불교계뿐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마애불을 세워달라는 요청이 많다. 2012년엔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걸로 결론지었지만, 다시 검토해 볼 여지가 있어 연구 용역을 시작했다”며 “연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최대한 변이 없이 보존·보호하는 데 힘쓰겠다”고 전했다.

경주 = 글·사진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