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소비에티쿠스’… 그들의 어제 그리고 오늘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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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핸드 타임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 있는 집

“저는 이 연단에 혼자 서 있는 게 아닙니다. 목소리들, 수백 개의 목소리들이 제 옆에 있으며 이들은 늘 저와 함께 합니다. (중략) 플로베르가 자신을 가리켜 인간의 펜이라고 한다면 저는 인간의 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거리를 지날 때면 단어들, 문장들, 외침들이 제 귀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 출신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사진)의 노벨상 수상 연설의 일부다. 수백 개의 목소리를 듣는 귀. 이는 알렉시예비치의 독특한 문학적 형식인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을 설명한 것이다. 그는 복잡하고 예측 불가한 세상(사실·fact)은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버렸기에 ‘허구’에 담을 수 없고, 또 사실은 단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사람의 수만큼이나 조각나 있기에 소설가의 역할은 그저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이를 구현한 것이 목소리 소설이다.

옛 소련에서 자랐던 작가는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옛 소련 사람들, 체르노빌 원전 사고 피해자 등을 수년간 인터뷰하고, 이들의 말들을 그대로 옮긴 작품을 출간해왔다. 인터뷰 대상의 대부분은 그런 시대를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이다. 일부에서는 이는 르포일 뿐이며 소설이 아니라고 하지만 일단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최고 수준의 아름다운 문학작품임을. 사람들이 마구 쏟아냈을 많은 말들 중에서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 생생한 체험, 삶의 핵심을 드러내는 에피소드, 세심한 감정들을 간결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문장에 담아낸 문학이다.

2013년에 출간돼 노벨 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세컨드 핸드 타임’은 작가가 수년간 러시아인은 물론 벨라루스인, 투르크메니스탄인, 우크라이나인, 카자흐스탄인 등을 인터뷰해 내놓은 것이다. 국적은 다르지만 작가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옛 소련의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들이다. 지난 70년간 마르크스·레닌주의 실험의 결과로 소비에트식 발상·사고·행동을 지닌 사람들. 작가는 자신의 지인, 친구, 부모 그리고 자신도 호모 소비에티쿠스라고 했다. 저자가 집중적으로 파고든 주제는 1991년 옛 소련이 붕괴한 뒤 모두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실패한 시간, 그 시간을 살았던 개인의 삶 이야기다. 공산 정권은 무너지고 자유를 얻은 듯했지만 돈, 빈부격차, 미디어 재벌이 들어섰고 정치는 더 공포스러워진 실패한 시간이다. 이에 젊은이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른 채 다시 마르크스·레닌 티셔츠를 입고, 스탈린을 위대한 정치가로 꼽고 사회에는 소련의 모든 것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세컨드 핸드 타임은 이 같은 시대에 대한 작가의 명명이다. “1917년 혁명 직전 작가 알렉산드르 그린은 ‘왠지 미래는 자기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을 그만둔 것 같다’는 글을 썼다. 100년이 지난 오늘, 미래는 또다시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 바야흐로 세컨드 핸드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