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배경보다 개인 기억에 초점… 관객에 진실과 허구 질문 던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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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빛의 제국’무대 올리는 佛 노지시엘 감독

두 남녀의 방황하는 서울살이로
정체성·기억 묻는 실험적 작품

韓·佛수교 130주년 합작 연극
문소리·지현준 남녀 주연 맡아
내달 서울 공연… 5월 佛 무대에

“평범한 인생과 그 내면의 욕망에 대한 과감한 찬가이자 저항할 수 없는 소설.” 프랑스 르몽드가 극찬한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이 프랑스 대표 연출가에 의해 무대화된다.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맞은 합작품으로, 한국의 국립극단(예술감독 김윤철)과 프랑스 오를레앙 국립연극센터(예술감독 아르튀르 노지시엘·사진)가 공동 제작한다. 노지시엘 예술감독이 직접 연출을 맡았으며, 한국의 톱 영화배우 문소리와 국립극단의 대표 배우 지현준이 주연을 맡았다.

‘빛의 제국’은 남한에서 평범한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북한 스파이 김기영(지현준)과 그의 아내 장마리(문소리)의 하루를 따라가는 이야기. 분단이라는 한국적 특수 상황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과 경계, 기억, 존재의 이유 등에 대해 묻는다. 노지시엘 연출은 “사실 남북 분단에 대해선 잘 몰랐다”면서 “작업 과정을 통해 한국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노지시엘 연출을 지난 19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오는 3월 4일 이곳에서 ‘빛의 제국’이 개막한다.

◇“남북보다 개인에 초점…기영보다 마리가 흥미로운 인물”=‘빛의 제국’은 국립극단이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작품 중에서 골랐다. 노지시엘 연출은 공동제작 의뢰를 받은 후 처음 소설을 읽고 재밌다고 느꼈다.

그는 “어쩌면 한국 관객들은 프랑스인이 바라본 남북 분단과 같은 걸 흥미 요소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건 오히려 기영과 마리라는 두 개인의 기억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영은 남쪽에 좋아하는 것들이 많지만 북으로 떠나야 할 인물이고, 마리는 좋은 것들이 많은 남한에서 방황하는 캐릭터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다른 두 얼굴을 대변하기도 한다. 기영보다 마리가 더욱 보편적이고 대표성을 띠는 인물이어서 그녀를 중심으로 각색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작품에는 기영과 마리를 연기하는 지현준과 문소리의 실제 기억과 고백들이 반영된다. 노지시엘 연출은 “단순히 소설을 무대화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생각이나 태도를 지배하는 기억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었다”며 “기영과 마리의 하루를 따라가면서,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진실과 거짓, 실제와 허구 등에 대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배우들의 실제 기억이 어떤 식으로 반영되는지 물었더니, 그는 “1994년이 기억나느냐”고 되물었다. “김일성이 죽었고, 여름이 매우 더웠고, 중학생이었고, 곧 전쟁이 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답하자, “바로 그것”이라며 “이는 꽤 실험적인 작업이다. 배우들과 매일 긴 토론을 하며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소리는 친근하고 똑똑한 배우…예전부터 좋아해 출연 영화 다 봤다”= 노지시엘 연출은 마리 역에 문소리를 일찌감치 낙점했다. 개인적인 팬이기도 하고, 또 이번 작품의 독특한 형식 때문에 영화배우를 발탁하고 싶었다고. 지난해 ‘스플렌디즈’에서 영화 같은 화려한 미장센으로 호평받은 그는 이번 ‘빛의 제국’에서는 영화(영상)와 연극(무대)을 대등하게 섞는 방식으로 무대를 꾸릴 계획이다. “영화에 익숙한 배우와, 연극에 익숙한 배우를 동시에 캐스팅하고 싶었다. 프랑스에서 한국 영화의 인기가 높은데, 나도 문소리 배우의 영화는 전부 봤다. 문소리와 지현준 두 배우 모두 정말 좋다. 친근하고 멋진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굉장히 똑똑하다. 함께 일하는 게 행복하다.”

그는 ‘스플렌디즈’와 ‘빛의 제국’은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예컨대, 전자가 아주 긴 시와 같았다면, 후자는 보통의 책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남다른 미장센을 기대해도 좋을 거라고 귀띔했다. 무대(리카르도 헤르난데스)와 영상(피에르 알랭 지로) 담당자들이 모두 ‘스플렌디즈’를 함께 만든 디자이너들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시간…이틀 만에 모두 하나가 됐다”= ‘빛의 제국’ 작업으로 인해 그는 약 한 달간 한국에 머무른다. 그는 “언제든 다시 오고 싶은 곳”이라며 “토론하거나 연습하며 배우, 제작진과 깊은 연대의식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기억’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서로 뭐든지 공유하는 게 중요했다. 하나의 작품을 향해 나가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보고 싶었는데 우린 그걸 이틀 만에 해냈다.(웃음) 특히 배우들이나 배우의 가족들이 맛있는 음식을 해와 나눠 먹는다. 감동적이지 않나. 완전히 나를 ‘먹여 살리는’ 중이다, 하하.”

그는 “한국 배우들은 매우 긍정적인 것 같다.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피곤한 일정이 이어져도 늘 유머를 잃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노지시엘 연출은 “프랑스에서 한국 영화가 많이 상영되고 있지만, 그동안 서울을 이렇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은 없었다”며 “이번 연극은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프랑스 현지에서의 공연도 매우 의미가 클 것 같다”고 전했다. ‘빛의 제국’은 3월 4∼27일 서울 공연 후, 오는 5월 프랑스 오를레앙 국립연극센터에서 프랑스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1644-2003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사진=국립극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