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진 교수의 드라마 세상>결혼계약, 물신주의 시대의 순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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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주의 시대에도 ‘순애보(殉愛譜)’는 가능한가. 돈만 있으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깟 순애보가 무슨 대수일까 싶겠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이야기로서의 순애보”는 여전한 관심거리이다. “인생의 가치가 돈뿐인 남자와 삶의 벼랑 끝에 선 여자가 극적인 관계로 만나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는” MBC 주말특별기획 ‘결혼계약’이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도 그래서이리라.

‘정통 멜로드라마’를 표방한다 해서 진부하고 상투적일 것이란 생각은 일종의 편견이다. 설령 ‘뻔한’ 사랑 이야기라 해도 무슨 상관이겠는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에도 오롯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 영원불멸의 사랑 아니겠는가. 그러니 지치고 힘들어 위로가 필요할 때 공감도가 높은 사랑 이야기라면 참신함이 담보하는 재미 정도는 없어도 괜찮다. 그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아도, 시나브로 다가와 외롭고 힘든 삶의 일부가 되어 준다면 상처는 저절로 치유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유한 남자와 가난한 여자가 각자의 필요 때문에 거액을 주고받으면서 결혼 계약 관계가 됐다가 사랑의 힘으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된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기본 줄거리이다. 부유한 남자 한지훈(이서진)은 안하무인의 냉정한 성품으로 다른 사람의 어려운 사정 따위는 헤아려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오만불손한 재벌 2세이다. 그리고 가난한 여자 강혜수(유이)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남긴 빚을 갚아야 하는 고된 일상 속에서도 일곱 살짜리 어린 딸을 위해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잃지 않는 싱글맘이다.

물질적 풍요 속에 남부러울 것 없을 것 같은 한지훈은 혼외자식이라는 인생의 결함 때문에 정신적 결핍을 겪는다. 그는 간 이식을 받지 않으면 죽게 되는 생모를 살려야 하는 정신적 압박까지 받고 있다. 반면에 어린 딸과 함께 어려운 여건에서도 정신적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강혜수는 빚 때문에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면서 물질적 결핍을 겪는다. 게다가 그녀는 가벼운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검사를 받다가 수술하기 어려운 위치에 종양이 생겼고, 생명을 담보할 수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는다. ‘간 이식’과 ‘돈’이라는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혼 계약을 맺은 두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정신적·물질적 결핍이 해소되고 상처도 치유된다.

부유한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사랑과 시한부 인생, 여기에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감을 퇴색시키는 ‘장기 밀매’, 서로의 필요에 의해 사랑의 제도적 장치인 ‘결혼’을 돈으로 ‘계약’하는 극적 상황 등은 전혀 새로울 바가 없다. 거액의 돈을 매개로 연결된 결혼계약의 당사자들이 물질적 가치를 뛰어넘는 숭고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성장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정한 사랑을 읊조리는, 너무나 ‘뻔한’ 멜로드라마가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다.

모두가 불행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세상을 살다 보니 감상적으로 변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지극히 통속적이지만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라고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에서 한 번쯤은 ‘사람답게’ 살고 싶은 바람이 물신주의 시대의 순애보를 주목하게 만든 것이리라.

충남대 교수·드라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