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高宗 서재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개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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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용 /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임금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그 속에서 폭넓은 통치의 철학을 배웠다. 그것이 제왕학이다. 그래서 조선왕조 역대 어느 임금이라도 신하들과 토론하는 경연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돼 있는 역대 임금이 쓴 서예를 보면 한결같이 유려한 필체가 돋보이고 지식과 지혜를 겸비한 마음공부를 꾸준히 했던 것이 눈길을 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재청이 경복궁의 ‘집옥재(集玉齋)’를 일반에 개방한다고 한다. ‘궁궐 속의 작은 도서관’으로, 시민들과 친밀한 공간으로 활용할 이곳에 서적도 비치하고, 열람 시설과 전시 공간도 마련한다. 평소에 문 닫힌 궁궐의 건물들만 바라보던 시민들에게는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에 한국학중앙연구원도 고문헌 서책의 비치와 함께 집옥재 내부에서 왕실문화강좌 등 대중 강연도 추진할 계획이다. 유서 깊은 궁궐 건축물의 개방은 고전의 향유와, 전통과 현대의 소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집옥재는 왕실의 서재로, 1881년 창덕궁에 작은 별당으로 지어졌다가 1891년 경복궁으로 옮겨 짓기에 이른다. 바로 고종 황제의 집무 공간인 경복궁의 북쪽 영역인 건청궁 옆에 서재로 마련됐다. 당시의 건청궁은 이미 1873년 고종 황제가 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독립적 정치 영역을 확보한 중심 공간이었다.

‘집옥(集玉)’은 옥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는 뜻이다. 고종 황제는 그 이름에 걸맞게 이곳에 약 4만 책이 넘는 귀중한 서책을 모았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천문·지리·수학·의학 등 서양의 신학문과 관련된 서적들이다. 모두 206종 1450책에 해당하는 이 책들은 개화 서적으로 분류된다. 자연과학 분야를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지리·풍물 등 서양의 근대 학문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대부분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 번역, 서술되거나 중국인들이 참여해 출판한 책들이다.

고종 황제는 밀려오는 서구 열강들에 대응하기 위한 부국강병의 길을 개화 서적에서 찾고자 했다. 따라서 서적을 수집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모은 서적들을 황실 내의 각 서고에 내려보내 연구하고 활용하게 했다. 서양의 신학문과 관련된 집옥재의 서적들에서는 개화를 향한 고종 황제의 꿈과 시대에 대한 고민, 그리고 지적·문화적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1907년 7월 일제에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 황제는 그 이듬해 대한제국이 일제가 함부로 만만히 짓밟을 나라가 아니라는 자존심과 자긍심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방대한 황실 도서를 수집해 본격적인 황실도서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일본의 침략 서슬에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고 경제 주권이 흔들리는 마당에 문화보국의 의지가 담긴 지적 독립운동이었다. 1908년 고종 황제는 집옥재의 도서를 모태로 하고, 궁궐 각처의 도서를 모아 대한제국 황실도서관을 건립하려 했으나, 1910년 경술국치로 일시 중단됐다가 1918년에야 창경궁에 장서각의 이름으로 세워졌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 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를 진정으로 알고 밖으로 나갈 때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우고 세계적인 존중과 신뢰를 받을 수 있다. 또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어제를 본받아 오늘을 다지고 내일을 향한 새로운 창의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 이제 대중 한류(韓流)와 함께 전통 속에서 세계인을 감동시킬 콘텐츠를 찾아 다른 나라와도 차별성 있고 품격 높은 전통 학술 한류를 키워나가는 데도 집옥재의 활용이 이 시점에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