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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상화가 8인 ‘애프터 드로잉’展

순수 기하학이 ‘점화’로 변신
연필 선 몇개가 ‘물방울’시초

김환기·김창열 등 대표 작가
아이디어 표현과정 설명해줘

한국에서 제일 그림값이 비싼 화가 수화 김환기(1913∼1974)는 처음부터 그렇게 점화 추상을 그렸던 것일까. 아니라면 그는 점화를 그리겠다는 발상을 어떻게 한 것일까. 그 같은 궁금증이 생긴다면 김환기의 드로잉북부터 먼저 봐야 한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현대가 26일 김환기 등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내로라하는 추상화가 8인의 드로잉을 모아 ‘애프터 드로잉’(After Drawing)전을 개막했다.

드로잉은 밑그림 정도로 폄하되지만 작가의 작품세계가 향후 어떻게 전개돼 나갈지를 살펴볼 수 있는 일종의 아이디어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환기, 김창열, 박서보, 정상화, 김기린, 윤명로, 이우환, 이승조 등 대표 추상작가들의 드로잉을 만날 수 있다.

김환기의 경우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무렵인 1959∼1960년 그가 35페이지의 드로잉북에 남긴 연작을 보면 그의 추상적 조형 언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추정해볼 수 있다.

첫 페이지부터 23페이지까지는 주로 1959년 5월을 전후한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산과 달 형상이 많다. 24페이지부터 27페이지까지 화병과 의자 등 일상의 모습을 스케치한 것이 나타나고, 28페이지부터 다시 순수 기하학 형식이 등장한다. 특히 28페이지와 29페이지는 기하학 형태가 색연필에 의한 점으로 발전하고 있어 점화의 탄생을 예고해 준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드로잉북은 1960년대에 김환기의 선과 면으로 이뤄진 순수 추상적 구성에서 (점화 추상 시대인) 뉴욕으로 이어지는 그의 예술적 노정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지를 풀어 물감에 갠 것을 화폭에 올려놓고 연필이나 자로 수없이 긋고 밀어내 완성하는 묘법(描法) 시리즈로 유명한 박서보의 드로잉은 건축 도면처럼 모눈종이로 구획된 엄격한 화면 위에 수치까지 더해져 있다. 그는 평소 이 같은 드로잉을 ‘감성 블랙박스’라고 부르며 그림의 기본률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모눈종이 위에 벌어지는 이러한 엄격한 제작 과정을 일종의 자기 가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는 박서보의 드로잉에 대해 “철저하게 자신을 가두어 가며 또 그러한 가둠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해방시켜 나가는가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물방울 작가’로 유명한 김창열의 드로잉 작품 두 점도 그의 향후 작품 세계를 미리 보여준다. 일 획을 긋듯 일렬로 늘어선 흰 점 몇 개와 그것을 가볍게 연필로 두른 작품과 화면 가득 흰 점을 찍고 그것을 연필로 두른 작품이 한 쌍을 이루고 있는데, 두 작품 모두 색연필의 흰 점과 그것을 두른 연필 선을 통해 그의 물방울 작품들의 원형을 엿보게 해준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