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nsumer >서민 울리는 ‘인지대’… 5억 날릴 판인데 소송 수수료 23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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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약자 권리구제 막는 ‘법원 행정서비스 비용’

1000만원 미만 소송은 0.5%
1억 미만땐 0.45%+5000원
2·3심 가면 1.5·2배로 늘어

변호사 수임료 더하면 ‘폭탄’
돈 부담에 소송 포기하게 돼

“폐지는 어려워도 개선해야”
“소송 남발 막는 최소의 조건”
재판청구권 침해 논쟁 분분

건설 관련 자재 납품 사업을 하던 50대 남성 A 씨는 수차례 거래했던 건물주 B 씨에게 약 5억 원에 달하는 자재를 납품했다. 하지만 빌라가 분양되지 않자 B 씨는 “줄 돈은 없고, 돈을 받고 싶으면 이 빌라를 사라”며 웃돈을 얹어 A 씨에게 팔려고 했다. 업계 특성상 자재를 먼저 납품하고 건물이 다 완공된 후 분양이 되면 돈을 받는 ‘후불제’ 거래가 이뤄지는데 B 씨가 작정하고 버티자, 돈을 받을 수 없게 된 A 씨는 법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A 씨는 변호사 수임료와는 별도로 법원에 내야 하는 인지대만 230만 원이나 된다는 데 깜짝 놀랐다.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인지대를 반드시 내야 했지만 건설 경기 악화 등으로 B 씨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못 받은 돈이 꽤 있었던 A 씨는 소송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B 씨가 ‘곧 파산 신청을 할 것’이라며 A 씨를 압박했다. 소송에 승리해도 돈을 다 받을 수 없을 것을 우려한 A 씨는 자칫 수백만 원의 인지대와 수임료만 날릴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결국 ‘다시 오겠다’며 변호사 사무실을 나섰고,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법원 행정 서비스의 수수료 개념인 ‘인지대’로 인해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재판 청구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인지대는 성공 가능성이 없는 소송을 막고 법원 업무의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지만, 과도한 인지대 때문에 국민이 권리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우리나라가 택하고 있는 소가연동제(소송 목적의 값에 인지대를 연동시키는 제도)와 심급상향제(심급이 올라갈수록 인지액도 오르도록 하는 것)는 경제적 여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재판청구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법무법인 송담의 신동엽 변호사는 “인지대 제도 자체는 법원의 사법 서비스에 대한 수수료 성격을 지니므로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다”면서도 “심급에 따라 일괄적으로 연동돼 1.5배, 2배의 인지대를 납부해야 한다든가, 사건 자체는 단순함에도 단순히 소가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천문학적으로 증대되는 인지대 산정 방식은 수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지대는 민사소송 인지법에 따라 민사 소송, 행정 소송 등의 소송 절차에서 소장이나 신청서 또는 신청의 취지를 적은 조서에 붙이는 인지(印紙)의 대금이다. 1000만 원 미만 사건은 소가의 0.5%, 1억 원 미만 사건은 소가의 0.45%에 추가로 5000원을 더 낸다. 10억 원 미만 사건은 소가의 0.4%에 5만5000원을, 10억 원 이상 사건은 소가의 0.35%에 55만5000원을 추가로 내야 한다.

여기에 2심은 1심 인지대의 1.5배를 내야 하고 3심까지 가려면 2배를 인지대로 내야 한다.

상한선 없는 인지대는 경제적 약자에게만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다. 2015년 사망한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이 남긴 200억 원가량의 빚 중 상당수가 삼성가 상속재산 반환 소송 과정에서 비롯된 인지대와 변호사 비용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당시 이 전 명예회장 등은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4조849억 원의 상속재산 반환 소송을 냈고 이 과정에서 법원에 납부한 인지대만 1, 2심 합쳐 171억 원에 달했다.

항소 여부를 고심할 때는 고액의 인지대 부담 때문에 승소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부분만 항소해 인지대를 크게 줄이기도 했다.

이 같은 인지대 부담이 공익 소송을 막기도 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송기호 변호사는 “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해줄 수는 있지만 인지대는 100% 당사자 부담이기 때문에 재판 결과가 불확실한 공익 소송에서는 아예 소송 착수를 포기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김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당선자는 선거 과정에서 인지대 인하 공약을 내놨다. 김 당선자는 “우리나라는 높은 인지대 때문에 처음 소송을 하기도 쉽지 않지만 소송이 잘못됐을 때 항소나 상고하는 것도 엄청난 부담을 받는다”며 “변호사로 지낸 30년 동안 의뢰인들이 인지대 때문에 항소·상고를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밝혔다.

김 당선자는 “인지대는 근본적으로 소송의 남용을 막기 위한 것인데 역으로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제한하는 의미도 갖는다”며 “이제는 좀 더 국민의 권익을 중시하자는 사법철학적 차원에서 인지대 인하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지대 관련 규정이 담긴 민사소송 인지법은 2014년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심판을 받기도 했다. 항공기 소음 피해에 대한 100억 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법원에서 인지대 미납부를 이유로 받아주지 않자 제기된 헌법소원에서 헌재는 ‘소송구조제도가 마련돼 있고 민사 소송 비용은 패소한 당사자가 최종적으로 부담하게 되는 점 등의 이유로 현재 인지대 제도가 재판청구권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고 판단했다. 단 강일원·서기석 재판관은 “소송 비용은 실질적으로 소송 가액보다 소송 내용에 따라 결정되고 국가가 남소 방지를 위해 적정 금액의 인지액 상한을 정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만큼 인지액의 상한을 정하지 않은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반대 의견을 냈다.

인지대 인하 필요성에 대해 법원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한 법원 관계자는 “사실 인지대를 낮추자는 건 재판에 지는 것을 전제로, 질 걸 대비해서 소송을 쉽게 제기하기 위한 것”이라며 “정당한 소송은 나중에 다 환급받게 돼 있는 만큼 인지대는 소송이 난립하는 걸 막는 최소한의 문턱”이라고 주장했다.

민병기·이후연·김리안 기자 mingm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