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예진흥기금 500억 책정… 기초예술, 외압서 자유로워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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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지난 8월 30일에 2018년도 예산 계획을 발표했다. 총 5조1730억 원 규모의 예산 계획에는 문화누리카드 1인당 지원액을 늘리고, 예술인복지금고를 신설하며, 블랙리스트로 인해 부당하게 삭제된 예산을 복원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문체부의 내년도 예산계획 중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일반회계 500억 원을 문예진흥기금에 투여하겠다는 안이다. 2003년 문예진흥기금 모집이 폐지되면서 지난 14년간 문예진흥기금은 계속 고갈되어 왔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인한 긴급 추경예산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일반회계에서 부족한 기금을 채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문체부가 기획재정부를 설득해서 처음으로 일반회계 예산으로 고갈 위기에 있는 문예진흥기금을 확충한 것이다.

문예진흥기금은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될 때, 예술인들의 창작 활성화를 위해 신설되었다. 주로 공연장, 전시장, 사적지, 극장 등에 입장료를 부과하여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2003년에 헌법재판소에서 강제적 모금에 따른 위헌 판결로 모집제가 폐지되었다. 2003년 5273억 원이었던 예산이 계속 고갈되어 2017년 말에는 적립금 422억 원으로 줄어들면서 완전 고갈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번 500억 예산 책정은 문예진흥기금의 고갈 사태를 막고 안정적인 기금 확충을 위한 교두보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부의 예술지원 정책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재정 정책에서 기금운용의 축소가 일반적인 경향임에도 불구하고 문예진흥기금이 확충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기초예술 지원의 안정성 때문이다. 기초예술은 대중예술이나 문화콘텐츠 산업과는 달리 그 자체로 돈을 벌어 자립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것은 기초예술이라 할 수 없다. 기초예술 지원은 국가 문화정책의 가장 중요한 근간이다. 기초예술 지원을 위한 재원 마련은 매년 예산을 짜서 사업을 꾸려야 하는 일반회계보다는 기금을 통한 안정적인 투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체계의 독립성을 위해서도 문예진흥기금의 확충은 필요하다. 문화예술위원회는 매년 2000억 원의 규모로 예산이 짜인다. 예산은 복권 및 경륜경정을 포함한 전입금과 기부금 등으로 충당하는데 이번에 일반회계로 500억 원이 투여되면서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다원화에 여력이 생겼다. 탄탄한 기금을 통한 위원회의 예산운용은 예술계 외부로부터 오는 압력과 청탁을 막아낼 수 있다. 안정된 재원이 이미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예진흥기금의 확충은 블랙리스트 사태로 인해 그동안 불이익을 받아 아예 폐지되거나 축소되었던 사업이 복원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예술인 창작지원을 위한 안정적인 재원 마련과 투명한 집행은 ‘블랙리스트’라는 우울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을 고수하는 긍정적인 출발로 작용할 것이다.

문체부의 현재 계획대로라면 2018년 문화예술위원회의 기금 적립은 442억 원에서 800억으로 늘어나게 된다.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정도 규모의 적립금으로는 예술인들을 안정적으로 지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문예진흥기금의 안정화라는 정책기조가 세워졌다면 단계적으로 기금의 적립 규모를 늘려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예진흥기금은 그저 돈을 쌓아놓기만 하는 ‘허영의 쌈짓돈’이 아니라 예술인들의 창작지원 환경을 튼튼하게 만드는 ‘알뜰한 밑천’이기 때문이다. 고갈된 문예진흥기금을 복원하는 일이야말로 불행한 블랙리스트 시대를 넘어서는 국가 문화정책의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