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출근합니다” 모두가 행복한 일터>할 수 있는 일 하도록 도와주는 곳… “삶이 바뀌었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제주시 기와5길 일배움터에서 근로장애인으로 근무 중인 허혁준(오른쪽) 씨가 15일 아버지 허유승 씨와 함께 작업장에 위치한 휴게 커피숍에 앉아 하루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

① 중증장애인 생산품 생산시설 ‘일배움터’

자폐 등 ‘장애 2급’ 허혁준 씨
前직장 두 곳선 씁쓸한 기억만
본인은 물론 가족도 마음고생

새 직장 다니면서 빠르게 적응
가족 행복 되찾고 결혼도 꿈꿔

젊은이들이 꼽은 최고의 효도가 ‘취업’인 시대, 정부의 국정과제 최우선 순위가 수년째 ‘일자리’인 시대. 일자리 문제는 더 이상 취업 당사자만의 고민이 아니라 가족은 물론 국가가 고민해야 하는 사회문제가 됐다. 취업문제는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게 더 가혹한 현실로 다가온다. 장애인 당사자는 물론 장애인 가족이 겪는 사회적 소외감은 비장애인보다 어려운 구직 과정에서 더 클 수밖에 없다. 반대로 장애인이 소중한 일자리를 얻게 되면 당사자는 물론 가족의 행복은 배가될 수 있다. 문화일보는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지원을 통해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 등 주위 사람에게 행복과 안정을 선사하는 장애인 일자리 현장을 찾아 4회에 걸쳐 소개한다.

“지금은 걱정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일한 뒤부터는 이 녀석 얼굴 표정이 따뜻해졌습니다.”

지난 15일 제주시 기와5길 ‘일배움터’에서 만난 허유승(60) 씨는 이곳에서 근무하는 아들 허혁준(29) 씨를 보며 이같이 말했다. 혁준 씨는 자폐 및 정서행동장애를 함께 가지고 있는 장애 2급의 청년이다. 그는 장애인보호작업장인 일배움터에서 생산하는 취나물, 무말랭이, 고사리 등의 건조농산물을 가공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일배움터는 중증장애인생산품 생산시설이어서 이곳에서 생산된 건조농산물은 ‘탐라지오’라는 브랜드로 공공기관 등에 우선 구매된다.

장애인 부모들은 자식의 미래 걱정이 크다. 아들이 4세 때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허 씨는 혁준 씨가 어른이 됐을 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직업훈련을 시켜 왔다. 도자기 만드는 법부터 제빵, 서빙 등 직업탐색 훈련을 했다. 허 씨는 “자녀가 장애를 지닌 사실을 접하면 부모는 보통 충격, 분노, 거부, 관심 순서로 반응을 보인 뒤 마지막에는 자식의 장래 계획을 세우게 된다”며 “그런 면에서 일자리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직업훈련을 했지만, 혁준 씨의 지금 일터는 세 번째 직장이다. 7년 전 대학을 졸업한 뒤 처음으로 얻은 직장은 제주도의 한 승마장이었다. 그곳에서 청소업무를 맡았지만 씁쓸한 기억만 남아 있다. 수습 기간 2개월을 보수 없이 다녔고, 1개월을 더 무보수로 일하자 급여협상이 진행됐는데, 고용주가 행정적인 월급과 실제 월급을 다르게 책정하자고 요구한 것이다. 당시 90만 원이 월급이라면 행정적으로는 90만 원으로 신고하고, 실제로는 30만 원만 주겠다고 했다. 허 씨는 “어차피 일자리가 없으면 그냥 집에 있으니 자기들에게 보내 자기들은 정부 지원을 받고, 혁준이는 돈을 받으면 좋지 않으냐는 식으로 말하더라”며 “그때 직장이라고 무조건 보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두 번째 직장은 장애인주간보호센터였다. 제주관광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혁준 씨가 사회복지사자격증과 유아복지사자격증을 보유한 것이 도움이 됐다. 그러나 그의 업무는 잔심부름이 대부분이었다. 허 씨는 “겉으로는 직장인처럼 보였지만, 2년 정도 일하면서 사실상 하는 일이 없었다”며 “혁준이가 그동안 일자리로 인해 스트레스가 많았고, 가족 모두 힘들어했다”고 했다. 그래서 혁준 씨가 그만두고 오게 된 곳이 5년 전 지금의 직장이다.

일배움터는 수습 기간이 3년이다. 함께 일할 수 있는지, 이곳 업무에 잘 적응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인 것이다. 오영순 일배움터 사무국장은 “혁준 씨는 2년 정도 만에 직원이 됐다”며 “본인의 적성이 이곳 업무와 맞아 빨리 된 편”이라고 했다. 업무에 적응하지 못해 수습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장애인도 적지 않다. 오 사무국장은 “이곳의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며 “혁준 씨는 가공된 농산물을 채반 건조기에 싣는 역할을 훌륭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허 씨는 혁준 씨가 이곳으로 직장을 옮긴 것을 두고 신의 선택이라고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된 덕분인지 혁준 씨는 이곳에서 일한 뒤부터 달라졌다. 허 씨는 “부모들은 보통 퇴근하고 온 자녀의 얼굴과 행동을 보고 일터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인지하는데, 혁준이는 기존 직장과 달리 스트레스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며 “자폐 장애인들은 길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혼자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은 그런 행동이 전혀 없다”고 했다.

허 씨는 일배움터의 장점에 대해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고, 또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장애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억지로 강요하기보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고, 하도록 도와주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는 또 “시스템 자체가 긍정적으로, 이곳 직원들이 관리만 한다면 이러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 없다”며 “장애인에 대한 생각과 배려가 깊은 환경이 갖춰져 있다”고 말했다.

혁준 씨가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허 씨의 삶도 이전과 달리 여유가 생겨 더 이상 아들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혁준 씨는 퇴근 후 피아노학원을 다니고 첼로도 배운다. 허 씨는 최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혁준 씨에게 자주 한다. 허 씨는 “직장을 가지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라며 “우리 혁준이가 먼저 실천하도록 하고 싶다”고 했다.

제주 = 이용권 기자 freeus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