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詩人의 산책길 따라… 어린아이 고운 이빨처럼 ‘새해’가 왔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종길 시인의 자택이 있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 인근 북한산 둘레길 입구에서 바라본 북한산. 가운데 하얗게 눈 덮인 봉우리가 인수봉이다.

(104) 김종길 시인의 터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경북 안동의 작은마을서 출생
1992년 임하댐 완공후 수몰
어릴적 타향 전전하다 서울로

스물에 등단…22년후 첫 시집
교수시절 강의 소홀 우려한탓
일년에 두세편만 쓴 寡作시인

40여년간 머문 수유리 주배경
현란한 기교·거창한 주제 탈피
사람들 마음 감싸주는 詩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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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送舊迎新),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김종길(金宗吉) 시인의 ‘설날 아침에’는 새해를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와 잘 어울리는 시다. 새해를 축하하는 연하장이며 희망의 메시지다. 시인이 건네는 귀한 덕담이다. 1961년 고대신문에 처음 발표됐고 첫 번째 시집 ‘성탄제’(1969)에 수록된 대표작이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시인은 새로운 연하장을 보내왔다. “우리네 새해 아침은/ 눈도 매화 송이로 이마에 와 닿고,/ 추위도 맑은 향기로 옷깃에 스며든다.// 우리네 새해 아침은/ 푸른 솔 가지 위에 학 한 마리 앉혀놓고/ 붉은 해가 치솟는 달력 그림만큼이나 의젓하다.” 혹여 그동안 우리네 인생살이가 더욱 ‘험난하고 각박’해졌을까 염려하여, 팔순의 어르신은 다시금 지혜를 아낌없이 나눠주신다. “괴롭고 가난했던 옛날은/ 이젠 차라리 한갓 그리운 추억/ 새해 아침은 앞날을 내다보며 오붓한 꿈을 설계하라.// 묵고 때 묻은 것은/ 묵은 해와 함께 보내고,/ 새해는 새롭고 깨끗한 것만을 있게 하라”(‘우리네 새해 아침은’). 부디 올 한 해는 뜻밖의 행운보다는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일상의 소소한 행복들이 늘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설날 아침에’ 시비는 서울광장을 지나 을지로 입구와 무교동이 나뉘는 사거리 빌딩 앞 화단에 있다. 지하철 입구에, 교통신호 조절기까지 양옆에 있어서 첫눈에 찾기란 쉽지 않다. 되레 건널목 건너편에서 잘 보인다. 시의 마지막 11행을 연의 구분 없이 세로로 새겼다. 뜻밖의 장소에서 시인의 시를 만나면 기쁨부터 앞선다. 그러나 주변에 그 흔한 안내문 하나 없고 시비의 옆과 뒷면에도 아무 정보가 없다. 이 시비가 왜 이곳에 있는지 또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도통 알 길이 없다. 다만, 시비 마지막에 새겨진 ‘글씨 서희환’에서 실마리를 얻어, 서예가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의 생몰 연대(1934∼1998)를 추론해보니, 족히 20여 년은 된 듯하지만,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워낙 지나가는 사람도 많고 매연도 심한 장소지만, 시비는 잘 보존돼 있고, 무엇보다 한글 서체의 대가가 써내려 간 글씨는 가만 지켜볼수록 멋스럽다.


김종길의 ‘솔개’ 시비는 시인의 고향에 있다. 안동 문화예술의전당에 있는 이 시비도 2013년 건립 당시에는 ‘어김없이’ 시인 생전에 그의 시비를 세우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어리석은’ 반대가 있었다지만, 무엇보다 이 시의 부제가 ‘안동에서’이니, 가장 적절한 곳에 세워진 셈이다. “병 없이 앓는,/ 안동 댐 민속촌의 헛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그 주위에 역시 이 고장 출신인 이육사의 시비(‘절정’), 권정생의 ‘빌뱅이 언덕’과 유안진의 ‘떡잎’ 시비들도 함께 있으니 차례로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이 시비의 경우 흔히 비 뒷면에 적게 되는 ‘설립 시기와 주체’를 시비의 앞부분에, 그것도 시 전문을 생긴 비석의 아래에 굳이 새겨 넣은 것이 눈에 몹시도 거슬린다. ‘솔개’의 또 다른 시비는 의외로 충남 보령에 있다(모산 한국육필문학공원). 역시나 시 전문을 새겼으나, 부제 ‘안동에서’를 제외했다. 무엇보다 유려한 친필 글씨를 만날 수 있어서 반갑다. 시인이 한학과 한시에도 조예가 깊고 서예에도 능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종길은 경북 안동군 길안면(현재는 임동면) 지례동(知禮洞) 635번지에서 태어났다. 고향 마을은 1992년 임하댐의 완공으로 완전히 수몰됐다. 그 직전에 중요한 고택들을 고스란히 마을 뒷산 중턱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지례예술촌’이 바로 그곳이다. “임하댐 준공으로/ 고향 마을은 거의 비어버리고,// 달맞이꽃만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 마을 사람들 대신 맞아주었다”(‘달맞이꽃’). 시인은 아주 이른 나이에 고향을 떠났다. 마을 근처에 학교가 없었기에 신교육을 받기 위해 선대인을 따라 청송군 진보로 이사했고, 다시 대구와 서울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래서인지 시인에게 고향은 살았던 곳이라기보다는 돌아가는 곳이다(‘고향에 돌아와서’). 이런 까닭에 그의 시 작품에 나타나는 고향 이야기는 뜻밖에도 아주 드물다. 물론 애써 찾으려고 들면, ‘성탄제’나 ‘하회에서’ 같은 시에 고향을 그리는 감정과 사라진 고향의 모습이 변형돼 숨어 있음을 알 수는 있지만, 이런 감성마저도 철저하게 절제돼 있어, 고향은 그저 수채화 물감 아래 연필로 그린 밑그림처럼 깔렸을 뿐이다.

김종길은 일 년에 두세 편을 쓸 정도로 과작(寡作)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약관(弱冠)을 겨우 넘긴 나이에 이른 등단을 했지만, 첫 시집인 ‘성탄제’를 무려 22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겨우 출판할 정도였다. 그가 시 창작에 얼마나 엄격한 기준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1992년 2월 교단에서 물러날 때까지 45년 동안 세 권의 시집을 냈을 뿐이다. 그나마 ‘하회에서’(1977)와 ‘황사 현상’(1986)은 첫 시집에 신작 시들을 보탠 것이니, 1991년 출간한 첫 번째 시선집 ‘천지현황(天地玄黃)’에 수록된 75편의 시는 곧 그때까지의 시 전집이라고 할 수 있다. 대략 일 년에 두 편 정도의 시를 쓴 셈이다. 시인은 “교수 시절에는 혹여 강의와 연구에 소홀해질까 염려해서 시를 많이 쓰지는 못했다”고 여러 차례 술회(述懷)했다.

김종길 시인은 이후에는 시 창작을 ‘비교적’ 활발히 하여 매달 두세 편을 꾸준히 썼고, 일정한 분량이 되면 차례로 묶어 시집을 간행했다. ‘달맞이꽃’(1997), ‘해가 많이 짧아졌다’(2004), ‘해거름 이삭줍기’(2008)와 ‘그것들’(2011) 등 4권의 시집이 바로 그 결과다. 그리고 ‘등단 65년 만에 처음 내는 진정한 시선집’이라고 스스로 평가한 ‘솔개’도 2013년 세상에 선보인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시인이 종종 저녁 산책을 즐겼다는 수유동 둘레길은 강북 01번 마을버스 종점인 통일교육원에서 시작된다.

이 무렵에 쓰인 시 작품에는 유독 ‘수유리’가 자주 등장한다. 시인은 40여 년을 살아 익숙해져, 새로운 고향이 된 수유동 주변을 시의 배경으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네 일상의 평범하고 소소한 주제를 애써 쉽고 고운 단어를 골라 담담한 어조로 써내려 간다. 하지만 좋은 시를 위해 창작의 마지막 순간까지 절제와 극기의 태도를 유지하며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오랫동안 갈고닦는다. 시가 어렵고 그래서 사람들이 읽지 않아, 결국 시가 죽어가는 어둡고 막다른 골목길에서, 그의 시는 홀로 ‘노오란 동그라미’ 어려 있어 더욱 ‘따스해’ 보이는 불빛이 된다. “시(詩)도 외등 불빛 같은 것이나 아닐런지./ 그 자체는 외롭고 슬프고 쓸쓸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다사롭게 감싸주니”(‘외등’).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작품은 내지 말아야 한다”는 시인의 지론을 평생을 두고 지켜낸 결과다. 현란한 기교와 거창한 주제가 잔잔한 울림이 되는 예는 없다. 난해한 어휘의 수사학, 그것의 다른 이름은 말장난이다. 김종길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시 창작을 꾸준히 이어간 영원한 현역 시인이었으며, “시인의 길이란 역사 속에서 지속하는 일”이란 자신의 말을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며 몸소 실천한 한국 현대시의 대가이다.

고려대 문과대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시인의 집에 심부름을 ‘자청해서’ 두어 번 간 적이 있지만,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봐도 쉽지는 않다. 근처에 둘레길 안내소가 생겨서 지나는 사람이 제법 많지만, 일단 골목길로 접어들면 지금도 무척이나 한적한 동네다. 초행길에 쉬이 찾기 어렵다고 미리 마중 나와 반갑게 맞아주던 시인은 이제 없다. 시인의 집, “뜰 앞 담장 따라 늘어선/ 상록수들은 주눅 든 기색이라곤 없고,/ 잎 진 활엽수들도 앙상한 가지들을// 추운 하늘에/ 꼿꼿이 쳐들고 있다”(‘가을 뜰에서’). 대문 옆 두 개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문패가 여전히 남아 있어 반갑다. 본명인 ‘김치규(金致逵)’ 옆에 작은 글씨로 ‘종길(宗吉)’이라고 적어 넣었다. 교수 시절에는 그 이름을 썼기 때문이다. 고려대 문과대에 널리 전해지던 이야기가 있었으니, 오래전 누군가 그만 그 이름의 한자를 잘못 읽었고, 그 후로는 흔히 ‘김치달(達)’ 교수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즉, 그의 ‘19∼20세기 영미시(英美詩)’ 강의를 그저 ‘치달 선생 현대시’라고 말하면 다 통했다.

“내 집에서 가까운/ 수유리 골짜기에 최근,/ 호젓한 ‘둘렛길’이 생겼다.// 나는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에 산책을 한다./ 둘렛길은 나의 노후를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다. 이 ‘둘레길’은 다음을 기약하고, 다른 장소들을 찾아가 본다. “나의 아침 산책은 대개/ 수유리 01번 마을 버스 종점 맞은편,/ 커피자판기 옆에 놓인 벤치에서 끝난다”(‘가랑잎 한 잎’). 버스 종점에서 통일교육원 정문과 둘레길 안내소를 지나고, 백련사를 거쳐 4·19 민주묘지까지 걷기로 한다. 칼바위는 배웅하듯 계속 뒤를 지켜봐 주고(‘칼봉’), 멀리 진달래 능선 너머, 밤사이 내린 눈에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한’ 북한산이 옆에서 내내 동행한다(‘고고’). 인상 깊다. 시인은 중국의 태산을 보면서도 이 풍경을 떠올렸다. “푸른 전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내보이는 태산의 속살,/ 그것은 영락없이 북한산의 그것이다.// 그리고 산꼭대기에 머무는 흰 구름 또한/ 백운대와 인수봉 위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태산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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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 시절, ‘현대 영미시’ 강의에 겁도 없이 ‘몰래’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저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호기심에 그냥 한번 들어나 가보자 하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딱 걸려버렸다. 수업 후 서둘러 나가려는 이 ‘불문과’ 신입생에게 스승께서는 커다란 안경 너머 예의 그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며 그저 한마디 말만 건네셨다. “그래, 우리 같이 공부하자.” 당황하여 이제 들어오지 않겠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결국 억지 춘향이 격으로 학기 내내 그 수업의 ‘학점 없는’ 막내 노릇을 했다. 당연히 강의 내용을 이해하기는커녕 태반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출석만큼은 열심히 했다. ‘시인’ 셰익스피어를 처음 알게 된 것과 여러 시인의 이름과 대표작이라도 주워들어 어디 가서 아는 체라도 슬쩍 할 수 있게 된 것은 오롯이 그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수업 중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원시(原詩)를 낭독하시던 그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난해, 시인은 T.S. 엘리엇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던 4월에, 그것도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영면했다. 시인 없이 맞은 첫 ‘설날 아침에’, 1주기에는 ‘몰래’라도 시인의 묘소를 찾겠다고 다짐하며 새 달력에 표시한다. 그저 묵은 인사 올리고, 프랑스 시인 중에서 유독 아끼시던 폴 발레리의 시라도 몇 편 읽어드리면 될 일이다. 몇 해 전에 우연찮게‘영문과’ 신입생 한 명이 ‘프랑스어 독해’ 과목을 청강해도 되느냐고 묻기에, 스승의 예전 말씀을 그대로 옮겼다. 오래된 사은(師恩)의 빚을 조금은 갚은 듯했다.

글·사진 = 박광수

불문학자·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