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자 그레이슨 페리는 “디폴트 맨들이 권력을 움켜쥔 손아귀에서 힘을 뺀다면 정말로 유익한 몇 가지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며 “과거의 남성성이 확실성, 극기를 높이 평가했던 것과 똑같은 정도로 새롭게 등장하는 남성성은 관용과 융통성, 다원성, 감정이해력을 소중히 여길 것”이라고 주장한다. 원더박스 제공
- 남자는 불편해-모두를 위한 남자만들기 / 그레이슨 페리 지음, 정지인 옮김 / 원더박스
분홍-女, 파랑-男 젠더구분
1940년대 이후의 고정관념
性차별·남성 폭력성 나타나
21세기 새로운 남성像 요구
‘울면 안된다’‘감정 숨겨라’
가부장적 사고에서 벗어나
사회변화에 적응해 나가야
남성성과 여성성, 젠더(Gender)가 확연히 구분되는 색깔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분홍색은 여자, 파란색은 남자 같은 것. 어릴 적 완구점에서 총과 자동차를 고르는 손은 남자아이, 바비 인형과 미용 기구 앞을 서성이는 발걸음은 여자아이들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다시 한 아이의 엄마와 아빠가 돼서는 대형마트에서 역시 자신의 아들과 딸을 위해 똑같은 자동차와 인형을 고르고 있다. 남자아이의 장난감은 활동과 싸움을 위해 디자인돼 있고 색상은 주로 파란색, 검은색 등이다. 반면 여자아이 장난감은 보살핌이나 가사와 관련된 게 많고 대개 분홍색이다. 한 세대가 지났건만 젠더화된 문화를 받아들이는 인식엔 한 치의 변화도 없는 것이다.
영국의 국민 아티스트이자 저자인 그레이슨 페리가 성장기를 보낸 1960년대만 해도 물질문화가 지금처럼, 이 정도로 놀랍도록 명확하게 젠더화돼 있지는 않았다. 특히 19세기까지도 분홍색은 오히려 가장 ‘남자다운’ 색이었다. 당시 성인 남자들은 빨간색 제복을 입었고, 남자아이들은 그와 비슷한 계통의 분홍색을 착용했다. 1918년 6월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여성잡지 ‘레이디스 홈 저널’은 아이들에게 어떤 옷을 입혀야 할지 주저하는 엄마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다양한 논쟁들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칙은 남자아이들에게는 분홍색, 여자아이들에게는 파란색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홍색이 더 단호하고 강력한 색깔이므로 남자아이들에게 잘 어울리고, 섬세하고 앙증맞은 파란색은 여자아이들에게 더 예쁘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로 위치를 바꿔오던 분홍색과 파란색이 젠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색깔로 굳어진 것은 대략 1940년대부터다. 물품 소매업자들이 마케팅과 판매의 목적으로 여자아이들에게는 분홍색, 남자아이들에게는 파란색이라는 이분법적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리고 1953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영부인 메이미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면서 이 같은 구분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고, 1970년대 페미니즘은 고착화한 색깔 구분에 저항하기에 이르렀다.
분홍색이 거쳐 온 역사만 보더라도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징들이 순전히 자의적인 기준에 좌우됐음을 엿볼 수 있다. 젠더를 명백히 표현하는 데 필요한 소품과 몸짓은 본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구성물이었던 셈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특히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은 그릇된 구성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는가. 그렇다면 21세기의 남성성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페미니즘, 젠더권력, 성평등이 다양한 시각에서 논의돼왔지만 저자가 주목한 것은 특히 남성성의 문제다. 스스로가 소수의 특권층에 속하는, 영국에 사는 백인 중년 남성이지만 동시에 어릴 적부터 성 정체성을 고민했던 ‘크로스 드레서(여성 드레스를 입는 남자)’로서 자기가 느끼고 겪었던 생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남성상을 모색해본 것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내세우는 두 가지 키워드가 바로 ‘디폴트(Default) 맨’과 ‘올드스쿨(Old School) 맨’이다.
디폴트란 ‘남자는 이래야만 해’라고 사회적으로 정해진 기준으로서의 남성성을 의미한다. 디폴트 맨은 남성 개개인의 내면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보스’로서 끊임없이 통제하고 명령을 내린다. “울면 안 된다” “감정은 숨겨라”고 강요한다.
‘올드스쿨 맨’은 전통적인 남성성의 관념에 의문조차 품어본 적이 없고, 사회 변화에 적응해본 적도 없는 남자들이다. “옛날이 좋았어” 같은 말을 뱉으면서 향수에 젖어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현실 속의 남자다. 그들은 변화에 저항한다. 야생 혹은 오지 생존 기술이 현대에도 필요하다고 믿는다. 남자들은 이런 디폴트 맨과 올드스쿨 맨의 세계에서 성장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왔다.
페미니즘은 수십 년 전 문화 충돌의 과정을 먼저 거쳤다. 처음엔 극단주의자로 보이던 페미니스트들이 나중엔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합리적이고 평범한 행동가로 받아들여졌다. 남자들도 똑같은 과정을 밟아갈 필요가 있다. 진보적인 남자들의 ‘차이’를 외면하거나 깎아내리지 말고 다른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새로운 남성상이 요구되고 있다. 남자들은 케케묵은 이야기 속의 전통적 남성성과는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감정들을 인식하고 적응을 시작해야 한다. 적응력이야말로 남성성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저자는 남자들의 ‘디폴트’와 ‘올드스쿨’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남자를 향한 따듯한 연민도 깔려있다. 남자로 산다는 것의 힘겨움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2003년에 영국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인 터너상을 받았고, 2008년에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선정한 ‘영국 문화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100인’으로 뽑혔다. 그는 남자들에게 손을 내민다. “남자들도 약하고 틀리고 직관적이고 모르고 불확실하고 유연할 권리, 특히 이 모두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240쪽, 1만4000원.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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