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배기동 “박물관 일 하며 수집벽·역마살 다 채웠으니 즐거운 인생이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14개 국내의 국립박물관(중앙 1, 지방 13)을 “편안한 마음으로 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는 박물관으로 만들고 싶다”고 바람을 피력했다. 김선규 기자 ufokim@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

“71년 서울대박물관 유물 정리
첫인연 맺은뒤 박물관 한우물
美 버클리大로 유학 갔을 때도
현지박물관서 학예연구원 일해

78년부터 구석기 유적지 발굴
93년부터 전곡 先史축제 개최
100만 찾으며 지역 발전하니
들끓던 주민 민원도 잠잠해져”

“北 왕건像 전시 성사돼 기뻐
스승 희랑대사 좌상도 서울로
남한서 1100년만에 사제만남
청자 등 고려유물 400점 전시

중앙박물관 ‘도시의 섬’ 같은곳
박물관 주변 걸을만한 곳 돼야
상업시설 유치해 접근성 개선
내년에는 가야전 개최할 계획”

배기동(66)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문재인 대통령과는 부산 경남고 25회 동기 동창이다. 그럼에도 지난 2017년 7월 배 관장이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선임됐을 때 문화계 인사들 그 누구도 ‘대통령과 친구여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고고학과 박물관 분야에서만큼은 배 관장이 국내에서 최고 권위자이자 전문가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 대통령 취임 이전에도 문화재청장과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바뀔 때마다 배 관장이 하마평에 올랐다는 것도 그 같은 정황을 입증해준다. 취임 당시 그는 “관람객이 지적 강요를 받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는 박물관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취임 후 1년여가 지난 현재 배 관장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하나 하나 펼쳐 보였다.

배기동 관장과의 첫 대화는 오는 12월 4일 개막해 내년 3월 3일까지 계속될 ‘대고려전’ 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대고려전’의 공식 명칭은 ‘대고려 918·2018, 그 찬란한 도전’이다.

“이번 대고려전에 평양중앙역사박물관에 있는 고려를 건국한 왕건상이 전시됐으면 했는데 오게 될것 같아요. 문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직접 빌려달라고 해 성사됐습니다.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고려전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서는 올해 가장 큰 프로젝트다. 특히 올해는 남북정상회담 등이 성사되며 남북교류가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른 시점이어서 북한이 소장하고 있는 왕건상의 서울 나들이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청동상인 왕건상의 서울 나들이에 맞춰 화엄종 고승이자 왕건의 스승으로 알려진 희랑대사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희랑대사좌상’을 박물관으로 모셔 스승과 제자의 1100년 만의 만남을 주선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은 희랑대사건칠좌상(보물 제999호)과 대장경판 이운(移運)을 부처에게 알리는 고불식(告佛式)을 내달 9일 오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가질 예정이다.

이어 대장경과 희랑대사좌상을 태조 왕건의 위패 등을 모신 경기도 연천 숭의전지(사적 제223호)로 옮긴 후 다음 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좌상과 대장경판을 인수한다.

“두 분의 만남은 한마디로 ‘세기의 만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고려전은 남북 사회가 많이 변했어도 과거의 언어나 역사문화는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드릴 것입니다. 그 같은 문화의 만남이 사람들의 만남으로 이어져 문화통일에서 정치·사회통일로 가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대고려전에는 청자와 불화를 비롯해 국내외 주요 고려 문화재 400여 점(외국 소장 고려 유물 90여 점 포함)이 전시된다. 대고려전에 대해 설명할 때 배 관장의 표정에는 의욕이 넘쳐 보였다. 40여 년간 박물관에서 일했으면서도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그는 믿는 듯했다. 지나온 그의 삶이 궁금했다.

“수십 년 동안 이쪽 일을 하며 누구보다 인생을 즐겁게 잘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물건에 대한 수집벽도 그렇고, 돌아다니며 사는 역마살도 그렇고, 모두 그 같은 제 성격과 박물관 일이 딱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배 관장의 박물관인으로서의 삶은 서울대박물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1971년 고고유물, 역사유물, 민속유물이 다 같이 있는 서울대박물관에서 유물을 정리하는 일로 박물관 일을 시작했다. 이후 호암미술관 등지에서 일했고, 고고학을 공부하러 미국 UC버클리대에 유학 가서도 현지의 인류학 관련 박물관에서 학예연구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삶을 얘기할 때 경기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를 빼놓을 수 없다. 1978년부터 79만3000㎡(24만 평)에 이르는 30만 년 전 구석기 유적지 발굴에 나섰고 1993년에 선사유적지 일대에서 구석기 축제를 개최하기 시작, 연 방문객 100만 명에 이르는 지역 고고학 축제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1992년부터 박물관 설립을 추진해 20년 만인 2011년 전곡선사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선사유적지 일대는 민통선에서 점차 풀려나며 토지이용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가 컸는데, 선사유적지로 개발제한구역이 되자 민원이 들끓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축제가 성공해 사람들이 몰려들고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며 주민들의 민원도 잦아들었죠.”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의 발굴성과와 박물관 설립, 축제의 성공적 개최 등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인지 그는 종종 전곡리를 ‘제2의 고향’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어쩌면 그처럼 여러 박물관과 고고학 현장을 누비며 살아온 그에게 또 하나의 넘어야 할 큰 산인지 모른다.

배 관장은 국립중앙박물관은 도시로부터 격리된 ‘섬’이라는 얘기를 주변에 하며 변신이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취임 초기에 ‘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는 박물관’이란 표현도 그와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우선 그동안 소외되고 발전 속도가 더디다는 지적을 받은 13개 지방 국립박물관 활성화 방안부터 얘기했다.

“각 지역의 박물관이 어떤 콘텐츠를 브랜드로 만들지 연구하고 큰 주제를 설정했습니다. 소속 박물관 브랜드는 경주가 ‘신라 역사’, 광주가 ‘아시아 도자 실크로드 거점’, 전주가 ‘조선 선비 문화’로 정해졌습니다. 백제문화권에 있는 부여는 ‘백제금동대향로(사비백제)’, 공주는 ‘웅진백제’, 익산은 ‘미륵사지와 고대 불교사원’에 주력하게 됩니다. 또 진주는 ‘한·일 문화교류’, 청주는 ‘전통공예’, 대구는 ‘복식’, 김해는 ‘가야’, 제주는 ‘대양과 섬’, 춘천은 ‘금강산과 관동팔경’, 나주는 ‘영산강 유역 돌널 문화’ 조사와 연구를 강화할 방침입니다.”

박물관별로 특화된 주제를 전시하고, 아예 브랜드도 그에 맞출 계획이다.

“그런데 경주, 부여와 달리 마땅히 특화된 주제를 찾기 어려운 곳도 있죠. 국립춘천박물관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은 국민이 휴식을 위해 강원도를 찾고 있고, 또 강원도에 수려한 경관의 산속에 절집이 많다는 사실에 착안해 전시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국립춘천박물관에서는 11월 25일까지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특별전 ‘창령사터 오백나한,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전이 열리고 있다. 현대 설치미술가와 협업해 유물이 전시된 공간은 지방 박물관에 대해 가졌던 ‘고루하다’는 선입견을 단박에 깨트린다. 설치미술가 김승영 작가가 박물관과 함께 설계한 공간에서 오윤석 작곡의 사운드를 들으며 표정이 다양한 나한상 사이를 거닐면 ‘강원도의 미소’라는 영월 창령사터 나한상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대해서는 용산기지 철수 문제와 관련해 계획을 밝혔다. 정부는 용산기지 이전으로 생기는 공터에 243만㎡의 공원을 만드는 용산공원 사업을 진행 중이다.

“박물관은 많은 이들이 레스토랑과 옷가게가 있는 상업적인 공간을 즐겁게 지나쳐 걸어와 전시된 문화재나 작품을 감상해야 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저희 박물관 주변을 보면 ‘굉장히 무미건조해’ 걸어올 만한 곳이 못 됩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배 관장은 대안으로 두 가지를 얘기했다. 첫째는 용산역 일대부터 박물관까지 무궤도열차를 다니게 해 관람객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하도시 건설이다.

“신분당선이 들어올 때 역이 박물관 앞에 생길 경우, 역과 용산역 사이를 지하도시화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 지하도시에 갤러리도 넣고 상업시설들도 유치해 박물관 주변을 즐거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죠.”

그는 “용산공원 내에 근대유산으로 남는 건물들의 활용권을 국립박물관이 많이 가져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용산공원 내에 남는 건물들을 박물관 공간으로 재활용하자고 기회가 되면 적극 제안할 예정입니다. 현재 뉴욕이나 러시아, 인도 등 세계 주요 국가나 도시의 10여 개 박물관과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는데 서로 유물을 빌려주고 빌려오는 방식을 통해 공원 내에 남겨진 건물들을 세계문화유산 전시장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죠. 남미문명관, 아프리카문명관 등의 형태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배 관장은 올해의 가장 큰 프로젝트인 대고려전에 이어 내년에는 ‘가야전’을 개최할 계획이다. 고려에 비해 스케일은 작아도 여러 개의 가야가 경쟁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온 과정을 조명하면 고대왕국 형성의 중요한 열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가야를 보고 있으면 마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연상됩니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도 가야처럼 산악지대에서 태동해 발전했죠. 현재 기초조사 중이며 내년 12월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한 후, 일본으로 옮겨 전시를 개최할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김해박물관에서 ‘홈커밍’ 전시를 하게 됩니다.”

배 관장은 현직 대통령의 고등학교 동기 동창이다. 그래서 더 행보에 조심을 기했을 것 같다. 실제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배 관장은 말했다.

“문 대통령과 따로 만나고 그러지는 않지만, 항상 감사해 하고 있어요. 대통령이 가야사에 관심이 큰 것도 그렇고 원래 인문학을 좋아하셔요. 지난 8·15 광복절 행사도 저희 박물관에서 했는데, 요즘 주간 박물관 관람객이 꾸준히 늘고 있는 것도 광복절 행사와 무관해 보이지 않아요. 저희 박물관으로서는 큰 덕을 본 셈이죠.”

대통령이 친구가 아니어도 배 관장이 관장으로 있는 한 국립박물관은 계속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과 지방의 13개 국립박물관을 통틀어 국립박물관에는 매년 100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한다. 점점 늘고 있는 방문객을 위해 배 관장은 어린이박물관을 별도로 세운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박물관에는 어린이, 중년, 노년 세대가 함께 옵니다. 아이들은 박물관을 찾으면 뛰어노느라 바쁘고, 중년 이후 세대는 다리가 아파 쉴 곳부터 찾습니다. 그래서 세대별로 분리해 맞춤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아이들만을 위한 어린이박물관 건립도 그래서 필요합니다.”

인터뷰=이경택 문화부 부장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