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가 현실과 닮아갈수록, 인간은 발전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가상현실의 아버지로 불리는 재런 러니어는 가상현실을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는 인간을 위한 기술로 본다. 자료사진

가상현실의 탄생 재런 러니어 지음, 노승영 옮김／열린책들

‘가상현실 아버지’재런 러니어
실리콘밸리서의 쓰라린 경험담
52개 질문 통한 가상현실 해설

“VR, 정교해져 혼동 일으켜도
뇌는 꿰뚫어보는 법 알아낼것”

“양복쟁이는 필요해. 하지만 경계를 늦추면 안 돼.”

이것이 실리콘밸리 정신이다. ‘실리콘밸리의 영웅들’은 기술의 놀라운 힘을 인류 전체가 누릴 수 있도록 애써 온, ‘공유 정신’으로 충만한 ‘히피들’이었다. 신들의 사유재산이었던 ‘불’을 훔쳐 인간 손에 쥐여준 프로메테우스처럼, 이들은 기업이나 정부 연구소 등에 갇혀 있던 정보기술을 ‘빼돌려’ 인류 전체를 위한 기술로 바꾸어갔다. ‘대박’을 노리고 달려드는 요즘의 벤처사업가와는 차원이 다른 정신이 이들에게는 있었다. “소프트웨어는 공기처럼 ‘공짜’여야 한다.”

그러나 ‘히피’로 시작해 ‘사업가’로 죽은 스티브 잡스의 일생이 보여주듯, 이들 중 기술을 대가로 돈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상현실의 탄생’은 여전히 ‘히피’로 남아 있으면서, 상업주의에 빠진 인터넷 문화를 비판하고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거듭하고 있는 ‘가상현실의 아버지’ 재런 러니어의 자서전이다. 전작인 ‘디지털휴머니즘’에서 그는 인간을 데이터를 생산하는 ‘디지털 농노’로 전락시킨 웹을 비판한 바 있으며, ‘미래는 누구의 것인가’에서는 초대형 기술기업들이 부의 대부분을 독점하는 디지털 경제의 현실을 고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면서도 “그러다 노예가 되지 않겠느냐”고 자책하는 장면은 이 책을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재런 러니어는 1980년대 실리콘밸리에서 “비디오 게임 산업에서 시작하여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가상현실(VR)이라는 분야에 투자 실험을 했으며, 동지들을 만나 VR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첫 회사를 설립했고, 모의 수술 같은 주요 응용 분야의 시제품을 제작”했다.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중인 VR 열풍의 중심에 있었고, “회사의 경영권을 둘러싼 투쟁”에 말려들어 실의에 빠져 실리콘밸리를 떠난 바 있다. 이 책은 그 쓰라린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책은 ‘VR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들을 52가지로 나누어 소개함으로써, 이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 섬세한 안내서가 된다. 이 대답들은 모두 ‘인간을 위한 기술’을 주장하면서 VR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한 자유인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어낸 것들이다. 이에 따르면 VR는 “완벽하고 사악한 스키너 상자를 만들기 위한 연장”이기도 하고, “사람을 광고 안으로 붙들어 넣는 궁극적 방법”이기도 하며, “인간성을 규정하는 모든 한계에서 벗어난 삶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내용은 인간을 착취하는 인터넷과는 달리 VR는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VR는 인간을 환각에 빠뜨려 현실을 잊고 새로운 세계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도구로 볼 수도 있지만, 재런 러니어는 차라리 이를 인간 경험의 확장 도구로 생각하는 듯하다. 저자에 따르면, ‘매트릭스’의 세계가 영화에나 존재하는 잘못된 상상이고, VR는 인간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스키너의 도구상자가 될 수 없다. “시뮬레이션은 우리의 몸을 결코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VR를 통해 우리는 몸과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탐색 실험을 수행하는 법을 배운다. 최고 품질의 VR를 접하면, 물질성을 파악하고 향유하는 우리의 능력은 정교해진다.” VR의 품질이 높아져 현실과 혼동을 일으킬수록 감각 역시 정련되면서, 인간은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는 법을 더 높은 수준에서 배우게 된다. VR는 습관에 빠져 좀처럼 새것을 경험하려 하지 않는 인간의 오감을 고도로 훈련하는 도구다. VR를 통해 인간은 “물리적 현실의 깊이에 대한 인식을 증강”할 수 있다. “끊임없이 현실을 탐색하고 시험”하는 “잠깐 동안 실제 사물이 아니라 가상의 사물을 예상”하고 뇌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VR가 발전할수록 “뇌는 끊임없이 조정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환각을 꿰뚫어보는 법을 배울 것”이고, 물리적 현실은 인간이 창조한 현실 바깥에 무한한 신비를 품고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특히 “방을 없애고 시애틀로 대체”하고, “몸을 없애고 거인의 몸으로 대체”해도, 기술을 최대한 밀어붙여 “몸이 달라지고 세상 모든 것이 달라져도” 그 사실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나, 즉 인간의 “내적 삶”은 최후까지 남는다. 기술은 결코 인간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영문 원제가, ‘새로운 모든 것의 새벽’인 이유이다. 536쪽, 2만2000원.

출판평론가 장은수

이성과 감성 콘텐츠 연구소 대표